08 여리고③: 라합 이야기(수 6.22-27)

20210425(묵상)-강해08

 

 

 

여리고: 라합 이야기

Josh. 6.22-27

 

    본문 관찰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구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2.9a)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2.10)

 

여리고는 생사(生死)의 갈림길인 교차로와 같다.

그곳은 완정정복이기에, 그렇다면  다 죽을텐데 라합 때문에 생()과 사()가 둘 다 진행된다. 즉 다 죽지 않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라합의 증언에 의하면 여리고성의 사람들은 40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듣고 있었다(2.9-12). 이 복음이 바로 생사의 갈림길이다.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사람 라합과, 그를 통해서 그의 가족들만이 생명의 길로 들어선다(2.12-14 6.22-25). 모두에게 생명이 아니다. 그렇다. 결국 다른 모든 여리고 백성들은 진멸된다(24). 왜 극과 극의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구원: 혈통인가, 믿음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7.38a)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가나안 7족속들 모두에게는 다 멸망(죽음)이 예고되었다. 라합과 그 가족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40년 전부터 이스라엘 광야교회(7.38)에서 불어오는 복음을 맛보고부터(2.9-11), 그리고 요단을 건너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듣게 되자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의 생명을 선택한다(2.4,12-13).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10.17, 11.34). 아무도 거룩한 하나님의 발자국(언약의 성취) 소리를 듣지 못했을 때 유독 라합만은 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나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은혜와 축복을 얻게 된다.

이로써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혈통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라합에게서 확인한다(1.12-13).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구원의 넓은 팔로 안아주신다. 이렇듯 진멸(殄滅, 진멸하라’/herem 7.2; 20.16-18)이라는 완전정복의 대상인 여리고 백성들(가나안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구원, 긍휼히 여기심)를 입게 되는 자들이 있음이 놀랍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라합의 믿음에서다.

그래서 더욱 라합이 귀하다. 비록 비천한 신분(기생)이지만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로 사망에 그대로 처해질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린다. 심판의 땅 여리고의 바닥에 있으나 구원의 하늘을 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써다. 이로써 라합은 이제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복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1.5-6a). 옛사람을 온전히 청산하고 새사람으로 가나안의 무대에 중생(거듭남)한 라합에게서 오늘은 다르게!”의 비밀을 본다. 그녀처럼 어제까지의 죄() 사슬을 끊고 오늘부터라는 의()의 붉은 밧줄을 타고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 앞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내일이라는 새로운 생()의 그림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그려가 보자.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가나안 7족속에 속한 라합에게 임한 것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발견된다. 사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출애굽 구원 공동체에 들어온 것은 라합만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잡족’(12.38)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을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이들도 역시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고전10.2), 광야의 노정에서 반석에서 난 물과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으며 거룩한 성찬에 참여한다(고전10.3-4). 그러니까 수많은 잡족’들인 이방인들도 광야교회(7.38)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라합은 어떤가. 그녀는 앞서 수많은 잡족’(12.38)처럼 세례와 성찬도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비() 이스라엘 백성인 가나안 7족속에 속한 자로서 정복(심판)해야 할 대상이다. 저주(심판) 받은 백성이지 언약 백성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온다. 왜 그런가. 그럼 무엇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여호수아서는 라합에게서 그 실마리를 전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곧 하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믿는 믿음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이 얼마나 놀라운가. 한편에서는 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심판을 통해 사망에 이르고(여리고 정복),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를 통해 생명에 이르는 일이 일어난다(라합家 구원). 라합만큼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라 합(22-25)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7b-38)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1.5-6a)

 

예루살렘의 영국계 고고학자 존 가스탱(John Garstang)1929-36년에 걸쳐서 발굴한 성과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이중으로 쌓여져 있었으며, 밖의 성은 6, 안의 성은 12자의 넓이와 안 밖의 두 성 사이는 15자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30자나 되는 육중한 성이었다고 한다. 이 높은 두 성벽 위에는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기생 라합의 집은 그 가운데 하나다(2.15).

약속대로 라합과 그와 함께 있었던 모두가 다 구원을 받았다(2.15-21 6.22-25). 정탐꾼을 만나고 최소 3주일만의 일이다(2.22, 3.2, 4.19, 5.10,11, 6.3,15).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여리고 백성들이 듣게 된 지 40년만의 일이다(2.10-11). 라합 역시 성인이 다 된 여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수십 년은 족히 이스라엘 쪽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온 여리고 사람들 가운데 오직 라합만이 이 복된 소식을 들음에서 이를 믿음으로 응답한다(11.31, 10.17):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약속의 징표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놓고 구원의 날을 맞이한다. 하루 이틀 사흘 . 마침내 요단을 마른 땅처럼 건너 여리고성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도는 자들 가운데 지난 날 자기 집에 머물었던 정탐꾼들을 찾기 위해 집중. 그러면서 창문에 매어 놓은 붉은 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구원의 날을 기다린다. 그녀는 그 기간 동안에 부모와 형제와 친족들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했다(23, 2.12-14).

여전히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영적인 흐름이 라합에게서도 발견된다(23). 어쩌면 노아의 때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어떤 여리고 사람들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세인 성을 바라보면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합을 통해서 전해 들은 생명의 길에 함께 동승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 둘 라합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과 바로의 백성들의 장자들의 운명을 결정한 첫 번 유월절 그 밤의 역사처럼 유월(逾越, Passover, ‘넘어간다’, 12.27, 16.1-7)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축복을 받는다.

완전정복을 통해 심판과 멸망의 여리고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 그리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유일한 조건은 무엇일까. 오직 믿음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그 들음에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 라합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구원공동체 안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스러기 묵상

 

한편 여리고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26).

산악지대인 중부 가나안(여리고, 아이성) 정복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적들을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고(6-9), 남쪽(10)에 이어서 북쪽(11)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엇보다 여리고 정복은 거룩한 전쟁의 시작이다는 의미를 갖는다. 특별히 다 멸하니라”(21)는 신명기 2016-18절의 명령에 근거한 순종이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20.16-18)

 

하나님이 전쟁()을 좋아하시는 분이시거나, 완전정복을 명하실 만큼 무자비한 분이라는 접근은 성경(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체결(15.12-21)하실 때에 후손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렇게 하셨다: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6) 그렇다면 여호수아 때에 비로소 이 땅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저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결국 여리고성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약속의 땅을 죄악이 가득한 땅으로 물들게 했기 때문이며, 택하신 백성들을 통해 그 땅을 거룩하게 회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다(5.15). 여리고의 재건축에 대한 여호수아의 경고(예언, 26)는 열왕기상 1634절에서 성취된다. 반세기가 지난 후였으니 사람들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며 기억하고 계셨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하지만 여리고의 미래만 기억할 게 아니다. 여리고 정복에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미래 역시 요동치게 될 것이어서다. 분명 승리다. 하지만 그 승리 뒤에 이어지는 미래는 참담하다. 여호수아와 함께 힘차게 달려온 이스라엘은 마침내 위기 국면을 맞는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라합의 과거 복음을 듣다(2.9-11).

출애굽한 이방인들인 수많은 잡족’(12.38) 가운데 들어있는 라합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홍해를 건너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이스라엘에게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식(일하심)을 심판의 땅 가나안에서 듣고 하나님께 항복한다. 가나안에서 복음을 들은 것이다.

 

라합의 현재 구원을 받다(22-23,25).

가나안에도 이방인, 곧 여리고 백성임에도 거기서 심판으로 멸망하지 않고 사는 자들이 있다. 여리고는 이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완전정복을 명하신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가 누구냐,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냐 이방인이냐로 구원과 심판을 나누지 않으신다.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자신은 멸망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관심하신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합은 가나안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라합의 미래 다윗의 조상이 되다(4.18-22, 1.5-6a).

라합이 하나님의 뜰에 심겨지자 그녀는 살몬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를 낳는다. 이 보아스가 룻을 통해 오벳을 낳고,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낳는다. 이렇게 라합은 다윗의 조상, 그러니까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는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1.5-6a) 라합은 이방인으로써 메시야의 조상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서 여리고에 있다. 반대도 가나안 자손들은 죽어서 여리고에 있다. 전자는 구원이지만 후자는 심판을 통해서다. 여리고를 어떤 모습으로 맞을 것인가. 그것은 여리고 백성들이, 동시에 라합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답을 알려준다. 여리고는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그림이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그것을 맞을 것인가. 역시 그 답까지도 이들 두 그룹의 사람들이 보여준다.

그럼 이제 우리 차례다. 구원 받은 자로 여리고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여리고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심판 받을 자로 설 것인가. 믿음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그렇다. 라합처럼 사는 자에게 미래가 있다. 이것이 믿음의 복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은혜의 믿음을 통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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