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여리고②: 일곱째 날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수 6.1-21)

20200105(양무리교회, 신년주일)-강해07

 

 

 

여리고: 일곱째 날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Josh. 6.1-21

 

여리고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소식을 이미 듣고 있었다.

광야 40년이 끝나고, 마침내 가나안 정복이다. 그럼 정복은 무엇인가. 이것은 출애굽 400년 전,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렇다면 가나안 정복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의 성취다. 요셉 한 사람이 애굽의 자궁에 심기더니, 애굽에서 거주한 지 430년이 끝나는 그날에(12.40-41), 마침내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만 가량”(12.37)이 출애굽을 하고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출애굽 후 다시 40년이 지나 오늘 곡식 거두는 때 범람하는 요단강을 마른 땅 같이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첫 문, 여리고성 앞에 온 이스라엘이 서 있다. 이로 보건데 그렇다면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 일을 최대 40년간이나 듣고 보고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가나안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은 그 얼마나 놀랍고 가슴 떨리는 뉴스였겠는가. 여호수아서는 그때의 상황과 형편을 이렇게 소개한다.

 

정탐꾼들의 보고서(2.24) -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여호수아의 선언(3.10) -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요단 서쪽 가나안 족속들의 고백(5.1) -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정신을 잃었더라.”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11.30)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시각이다: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11.30) 그는 가나안 정복을 위한 여리고 전투의 사건과 이야기를 믿음으로라는 후렴구에 담아낸다. , 이 부분이 오늘 메시지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6일 동안, 그리고 이어서 7일째 7바퀴를 도는 시간 내내, 거기까지 믿음으로였다는 얘기가 아닌가.

   

 

믿음은 이처럼 당장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루 1바퀴씩 6일을 묵묵히 걸어서 여리고성을 도는 것이다.

 

왜 그럴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 7일째 날은 일곱 바퀴를 그렇게 순종함으로 끝까지 성을 도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믿음이다. 그리고 그리하였는데 왜 성이 무너지는가. 그래서 우리는 새해 아침에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믿음은 나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 하나님인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주인이 명하신 그대로 언행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역사는 바로 그때 일어난다.

 

(1) 첫 날 1바퀴를 돌았더니 여리고성이 흔들흔들 거리고, 둘째 날 다시 1바퀴를 돌았더니 여리고성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셋째 날 다시 1바퀴를 돌았더니 여리고성에서 주먹만 한 바위들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뭔가 조짐이 일어났다면?

여러분, 만일 이처럼 일이 일어났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고 행했더니 뭔가 분명해 보이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의심 없이 여리고성을 날마다 신나게 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이스라엘은 6일 동안 날마다 한 바퀴를, 그리고 7일째 날에는 무려 7바퀴를 묵묵히 돌고 돌았다.

오늘로 이야기해 보면 1월부터 6월까지 헌신하고 믿음으로 살아도 상황은 그래도다. 그럼에도 다시 그 무더운 여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명하시고 말씀하신 바대로 언행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그럼에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도 변함없이 일터에, 직장에, 공부하는 자리에,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의 길을 걷겠는가.

 

(2) 일곱째 날 7바퀴를 다 돌고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외치기 전까지 성을 전혀 무너질 기미가 없었다. 예수 믿고 세례 받고 살아온 지난 날들이 여리고성을 도는 것과 같은 시절이다. 그럼에도 2019년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2020년을 또 말씀으로 순종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토요일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청소하고, 주일 식사 당번이 되어 주방에서 또 밥과 반찬 만드는 일을 해야 하고, 이렇게 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냥 일상이다. 그 일상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3) 이스라엘이 그랬듯 우리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를 성취해 가는 길이 그렇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고 증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지거나 결과가 보여지는 게 아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이 과연 함께 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실제가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쫓아 묵묵히 믿음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4) 이스라엘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곱째 날 다시 하나 둘 셋, 그래도, 넷 다섯 여섯 바퀴를 돌고 돌아도 여리고성은 견고했다. 성경 고고학자들의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전차가 왕복으로 달릴 만큼 그 폭이 넓고 견고한 성이었다. 수 십 만의 사람들이 쿵쿵거리며 걷는다고 무너질 그런 모래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고 나면, 이 견고한 성마자도 하나님의 명하심 앞에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이스라엘이 세상 앞에 보여주는 하나님이다.

이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무슨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늘 사모하고, 주일이면 어김없이 예배자의 자리로 나아가고, 헌신하자 섬기자 드리자 나누자 그러면 또 기꺼이 시간과 물질과 신앙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 이 평범하디 평범한 하루하루를 여리고성을 도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며 품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무엇이라구요? , 믿음이다.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얼마나 많은가, 기병대와 공성퇴를 얼마나 가졌는가, 포탄과 다이너마이트의 용량이 얼마나 강력하고 최첨단인가, 그러니까 무기와 병사들의 능력과 사기가 얼마인가가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에 요구된 기준이 아니었다. 믿음의 여정은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예산이 얼마나 되느냐, 유력한 자가 얼마나 있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정복은 보여지는 사람의 면면이나, 그런 세상적인 군사력과 무기의 능력에 있지 않다. 세상은 그런 것들을 얼마나 준비하고 갖췄는가를 기준 삼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주신 믿음은 이것들을 의지하지 않도록 이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과 가나안 족속에게, 우리가 세상에 보여줘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

   

 

과연 믿음으로는 어떤 것인가.

 

정복전쟁이요 전투인데 믿음이다. 전쟁인데 믿음이다. 놀랍다. 그리고 의아스럽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6일 동안 날마다 한 바퀴를,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일곱 바퀴를 도는 것과 믿음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한 해 시작을 하는 신년주일 아침에 마치 여리고성을 돌고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돌아야 할 새해 한해를 걸어감에 있어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믿음은 내가 1-6월까지의 목표와 1년 계획을 만들어 놓고 그걸 어떻게든 이루어 보겠다며 끼워 넣는 수단이 아니다. 만일 믿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이라면 믿음은 그냥 어떤 목적을 위해 견디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야 결과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그 믿음에 무슨 의미와 열정과 희생과 눈물과 고뇌와 갈급함과 열망과 기다림과 같은 가치가 들어있겠는가.

이렇듯 믿음은 내 야망, 욕망, 욕심, 자기 확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원하는 일에 참여하는 그분을 향한 신뢰요 확신이자 의존이다. 이를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근거와 기초가 자신에게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장한 자기 확신이요 신념이고 욕망이자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얄팍하고도 교묘한 인간의 야망이다.

믿음의 기본과 기초가 바르게 서 있지 않으니까, 흔들리고 불안하고, 그래서 하루 이틀 걸어가다가 포기해버리거나 혹은 불길한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 최면과 자기 확신이라는 주문을 강화시키면서 이를 위해 믿는다는 하고, 이렇게 버티어야 하니까 반복적이고 주술적으로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결국 흔들리는 자신을 붙들려고 애쓴다. 그러니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 아니라 내가 나를 붙들고서 내가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하는 일종의 자기 최면과 자기 확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기에 자기 욕망이 점차 더 투사되고 또한 어떻게든 그것을 얻고 이루어야 하니까 종교성을 강화하는 것을 믿음이라 착각한다.

이게 다 동양 종교적 발상에서 비롯된 일시적이고 지극히 이해타산적인 믿음이라는 허상의 실체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만들고자하는 것, 이것을 믿음이라 하고 있으니 그가 살아가는 삶의 모양과 모습과 내면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겠는가. 결국 믿음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믿음은 그런 것인가.

 

여리고성을 정복해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가나안 족속들이 보인 반응은 두려움을 넘어 거의 패닉 상태였다. 왜 그러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이스라엘은 온 몸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칼과 창과 벙거를 보고 무너진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이 그 견고한 성을 무너지게 했는가. 믿음이다. 믿음으로 무너졌다. 이 믿음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비밀병기다.

오늘 가깝게는 가족에게, 좀 넓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가나안 족속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보여준 반응처럼 세상은 지금 우리에게도 두려워 떨고 그러는가? 믿음이 있다면 그렇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있다면 세상은 우리의 밥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고, 그분이 살아계심과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일에 실패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 결코 항복하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다. 가족들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느끼며 두려워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 보이는 일에 믿음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다르게 산다. 가나안에 사는 여리고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돌고 있는 자들을 두려워했고,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그 성을 날마다 돌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명하신 일에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다. 그럴 때 여리고가 그러했듯이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우리의 믿음이 역사하는 순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할지라도, 그러니까 그렇게 믿음으로 선포하고 발걸음을 내딛어도 세상이 그냥 항복하고 무릎을 꿇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돌아도, 날마다 믿음으로 순종해도 세상은 7일째 되는 날까지 하나님과 믿음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이 하루에 1바퀴씩 여리고성을 돌고 있는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도 가족들은 여리고성 사람들처럼 우리를 향해 무관심하고, 비웃고, 하나님 알기를 뭐 알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그게 망하는 징조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야 한다. 이게 믿음이다. 저 꼴보기 싫은 OOO 때문에 여리고성을 돌지 못했노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믿음으로 한 해를 돌아야 하고, 믿음의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 놓은, 말하자면 2020년이라는 세상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헌신하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아도 세상(화명동, 대한민국, 열방)은 꿈쩍하지 않는다. 가깝게는 가족 역시... 그래도 우리는 믿음을 따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자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여리고와 같은 세상이다. 그리고 가정, 가족, 사람들 앞에서 살아내야 할 믿음의 여정이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다. 그래도 12월까지 믿음으로다! 그 여정을 우리 같이 해 보자!

 

   

  • 여호수아 6장은 지난 2000년 1월 5일(신년주일)에 이번 강해에 앞서 설교했다. 때문에 2021년 3월부터 여호수아 강해를 시작하면서 설교문을 순서를 따라 올린다. 설교 동영상(VOD)은 홈페이지 -> 설교 -> 해당 날짜에서 볼 수 있다.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TT4-0uBcZ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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