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여리고①: 또 하나의 여리고성(수 6.1)

20210418(양무리교회)-강해06

 

 

 

여리고: 또 하나의 여리고성

Josh. 6.1

 

    본문 관찰

 

     1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원인1)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결과1)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결과1)

     2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원인2)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멸하니라(심판, 결과2)

 

 

여리고 백성들도 이미 하나님의 소식을 듣다.

 

가나안은 지금에서야, 왜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변함없이 계시는 분이다. 그런데 왜 어제는 두려워하지 않더니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는 오늘에 와서야 두려워 정신을 잃을 정도로 패닉에 빠질까. 지난 이야기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먼저 지난 광야시대에 대한 가나안의 반응이다. 29-11이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또한 정탐꾼들의 지금 현재의 가나안에 대한 보고다. 이들은 지난 광야시절에 선배들이 보인 반분된 보고와는 전혀 다른 보고를 여호수아에게 올렸다(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이스라엘에 대한 가나안 족속들이 오늘 보여준 반응이다(5.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마침내 지금 가나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 떨고 있다.

 

요단 딜레마: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3.15a)

그럼에도 한편으로 여리고와 가나안 백성들은 요단강을 바라보며 순간 안심했을 것이다: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3.15a)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이지만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장애물을 넘어 선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앞서고, 그 뒤를 온 이스라엘이 뒤 따르고, 그리하여 언덕에 넘치는 요단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요동하지 않고, 제사장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정작 여리고 백성 자신들에게 유리하리라고 판단했던- 요단이 그만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너게 되었으니 말이다(3.15-17).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리고 백성들과 싸우려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른”(4.13)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처럼 전선(戰線)은 팽팽한 긴장으로 점점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고 있다.

, 이미 가나안 백성들은, 그러니까 여리고는 복음을 들었다(2장에서 듣게 된 기생 라합의 간증).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 이것은 이미 한 가정에 가족(, 며느리, 아버지)을 통해 복음이 들어간 것과 같다. 하지만 시댁(친정)은 먼저 복음을 들은 가족들로 말미암아 그 가정은 교회금지령으로 굳게 복음에 반대하고 있다. 이것이 가나안의 영적 분위기다. 그렇다면 세상이 복음에 대해 이처럼 문을 닫고, 거부하고 있을 때 복음은 어떻게 그 땅과 백성들을 정복해 가는가. 이것이 여호수아 6장에서 지금 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이다.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1a)

 

왜 여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정신을 잃었고 또한 떨고 있는가. 이스라엘은 평지에 있고, 여리고 백성들은 지금 견고한 성()에 있다. 모든 면에서 그들이 유리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이 과연 누구이기에 여리고 백성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있고, 여리고의 가나안에는 하나님이 없다.

 

1. 세상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한다.

언약궤를 앞세우고(3.3,8,13 3.14-16)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쳤다(4.1). 언약궤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이며,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sign)이다. 이것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여리고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이스라엘을 건네셨음을 듣고마음이 녹았고정신을 잃었더라’”(5.1)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서 역사 하시는 것을 친히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 없는 가나안의 백성들의 떠는 모습을 보라. 여리고 백성들이 두려워 한 것은 보이는 언약궤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이전에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동시에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1a)

그렇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들어내는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세상이 나를 보면서 동시에 내 안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나의 존재 목적이 아직 성취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작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상대해야 할,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다

 

    →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교회, 우리 가정, 나)

현대의 여리고 백성들인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이처럼 두려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의지하며 따르는 하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여리고 사람들에게도 역시 두렵고 떨리는 권능의 하나님인가.

 

2. 이스라엘(그리스도인)은 여리고 백성들에게 어떤 사람인가?

아직 요단을 건너지 못하고 두려워서 요단 앞에 벌벌 떨고 있다면, 즉 이처럼 무능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있다면, 아무리 죄의 깊은 잠을 자는 여리고 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무능력한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할 턱이 없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신 영혼들이 무능하고 초라하고 믿음 없는 한심한 성도들을 보며, 과연 하나님(예수, 기독교, 교회) 안에 있다고는 하나 아무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오히려 여리고성은 무너지기는커녕 그리스도인을 비웃으며, 도도하게 우리 앞에 서 있다. 마치 이스라엘을 능욕하는 골리앗처럼 말이다. 이것이 현재 나의 모습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럽고 죄스러운가. 이런 무력한 자에게서 결코 세상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현대의 여리고 백성들 앞에 이스라엘을 통해 무엇인가 새역사를 이루시기를 계획하고 계신다. 이것이 정복 전쟁이다. 하나님 없는 세상인 가나안은 먼저 이 사실을 알았다. 진군해 들어오는 영적 이스라엘의 깃발을 그들은 지금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

   

 

[2]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1b)

 

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움츠러든다. 세상은 늘 이처럼 하나님, 진리, 교회, 그리스도인을 거부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능력에 따라 살아가자 여리고는 그것만큼 패배자의 모습으로 주저 앉아 버리고 만다. 놀라운 것은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고, 지금 가나안은 앞서 하나님의 소식을 들어 알고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와 상관없이 세상은, 죄인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여리고, 하나님을 거부하다.

세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성문을 여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자기를 버려야, 자기를 포기해야, 자기가 결국은 멸망해야, 없어져야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죄라는 자존심이 이러한 진리를 끝까지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게 세상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교제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죄의 높은 성을 쌓고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 그 누구와도 삶으로 부딪히지 않는다. 자기라는 성을 높이 쌓고 그 안에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다른 양식에 불과하다.

우리 역시 <여리고의 경고>에 영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직접 여리고 성을 허시며(멸하시며) 성문을 열고 전쟁으로 찾아가셨듯이 나의 자아, 양심, , 자존심, 명예, 건강, 재물, 자녀, 신앙을 허시면서까지 우리를 정복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전쟁으로 주어진다. 평화가 아니다.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말하니라”(21)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거부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고 굳게 닫아 버렸던 성, 그곳에 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은 흔적 없이 멸망 당하게 되는 영적인 전쟁이다.

   

 

부스러기 묵상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지키며, 믿으며, 이를 행하며 산다. 할례를 행하는 것이 그것이고, 유월절을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앞서 군사령관으로 정복전쟁에 친히 참여하신다.

[1] 여기에 대한 세상 곧 가나안 7족족들의 반응을 보라. 어떤가. 긍정적이지 않다: ‘하나님께 항복하는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무릎을 꿇는가. 하나님을 인정하는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가.’ 답은 무엇인가. 전혀 아니다.

[2]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7족속들 곧 세상의 반응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라. 어떤가: 실망인가. 분노인가. 아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6장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묵묵히 가나안 정복을 향해 걸어간다. 세상의 악과 죄에 타협하거나 그것에 물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사명 쪽으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해 들어간다.

기적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 게 아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루 1바퀴씩,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에는 7바퀴를 조용하게 말 없이 돌아라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 들고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바로 그 날부터 기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기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날마다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기적인 셈이다. 죄인이어서 죽은 자가 있으나 죄인인데 용서 받아 새롭게 살아가는 죄인이 있다. 이게 기적이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가 있으나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의인된 죄인이 있다. 이게 기적이다.

똑같이 여리고에 있다. 여리고 백성들은 성안에 있고, 이스라엘은 성밖에 있다. 그런데 성이 무너지자 성안에 여리고 백성들은 다 죽어가고, 성밖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살아서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놀랍지 않은가. 동일한 현장이 있었다. 그런데 누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살고(유월하고), 누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죽은다. 놀랍다. 바로 이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7일이 축제이지만, 여리고 백성들에게는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형벌의 서곡(序曲)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7일 후의 자신들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굳게 닫혔고처럼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줄로, 안전할 줄로, 잠깐이면 이 위기는 모면될 줄로, 그러나 자신들이 쌓은 성은 결코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본다(12.16-21):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여리고는 결코 하나님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 세상과 사탄은 결단코 하나님을 정복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정복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뿐이다.

우리 인생 길에는 어떠한 또 하나의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는가. 내 안에 사탄의 요세와도 같은 여리고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그 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죄의 짐에 짓눌려 절망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가주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여리고성을 보여 주실 때마다 그것을 말씀과 성령과 기도로 정복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다.

이 땅에 또 하나의 여리고성은 지금도 존재한다. 하나님을 막으면서까지, 거부하고 대적하면서까지 하나님 없는 거대한 성을 쌓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저들을 정복하게 하신다. 누가 정복하는가.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정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룩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영적 군사로 이 세상 앞에 사야 할 교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바로 '나'다. COVID-19라는 것을 이용해 기독교를 거부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여리고성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이스라엘 자손인 거룩한 성도들이다. 이 믿음으로 여리고를 향해 믿음의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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