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의 황무함을 보소서!(삿 2.11-23)

20211105(묵상)

  

 

 

가나안의 황무함을 보소서!

Jdgs. 2.11-23

 

    본문 관찰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18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사사기의 순환 싸이클

 

이스라엘의 선택(11-13)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부재중이다(11-13). 안타깝게도 지금 이스라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에서 실패하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어떻게 선민(選民)이 이 역할 밖에 한 일이 없을까? 그것도 언약(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말이다.

 

11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을 행하여

 

자손(子孫)에 주목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2.7b)인 선조(先祖)다 그 조상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는 바로 그 자손이다.

부모와 자손의 대()가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을 목도한다. 한 개인이 그럴 수 있고, 한 공동체(교회)가 그럴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3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어떤가? 하나님 앞에 우리 가문의 형제들과 또한 후손들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 받을 것인가?

 

12 - “그들의 조상들의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악행’(惡行) 뿐이다. 이것은 가능성(예상)이 아니라 필연성(결과)이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찾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고 하는 그런 일회용이 아니다.

성경은 믿음 좋은 아버지 밑에서 패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을 긍정한다. 100년 전, 아니 20-30년 전에 좋은 교회가 지금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서구 유럽교회가 그 증인들이다. 열조(조상, 선대)의 하나님은 온대간대 없고 하나의 빛바랜 과거의 이력서만 남아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왜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가나안의 토착 신들이 혼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이 거짓 우상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가나안의 풍요(축복)는 부요 뒤에 찾아오는 유혹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물질만능과 음란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쪽으로 타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응답(14-15)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임재중이다(14-15).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재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 인생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시며, 어디까지 그 죄과(罪過)를 물으시는가를 실증적으로 예증하고 계신다. 이스라엘은 부끄럽게도 하나님의 임재를 이렇게 밖에 맞이할 수 없었다. 비극이다.

 

14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예언은 적중한다(31.16-21). 마침내 하나님은 악과 죄를 진노하신다. 그냥 묵과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그 책임(죄의 값)을 물으신다.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력화할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당신을 경배하고 예배해야 할 백성들이 가짜 신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불신앙과 타락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에 불과하다.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져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심은 대로 거둔다. 하나님을 떠난 즐거움은 잠깐이었지만 그 대가는 매우 값비싸다. 그들은 피눈물 나는 불신앙의 열매를 거둔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심판은 내가 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것 가운데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세상의 것이 잡다한 것이 떠나지 않는다. 소유가 자꾸 내 손을 떠난다. 나를 대적하고 피곤하게 하는 세력이 지뢰밭처럼 내 주위를 포진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길 능력이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성도에게도 시련은 있다(6.13,7.25,26.41, 고전10.13, 벧전1.6). 그러나 죄는 이 시험을 이길 힘과 능력을 무력화시킨다. 영적 능력은 성결과 거룩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죄가 아이성 전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경험했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지금 그 죄의 값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여호수아 2420절의 성취다.

 

15 -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찬송가 4791)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면 그것은 심각하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주님을 따르는 복음의 여정에서 만난 괴로움이라면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6.34b)지만, 반대로 자기 죄() 때문이라면 문제는 전혀 다르다. 때문에 사사기는 예사롭지 않다. 참으로 심각하다.

   

 

사사들을 통한 구원(16-19)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18a)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 18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슬피 부르짖으므로

 

               →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부스러기 묵상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2)

 

나의 심령의 문패는 지금 하나님은 부재중이란 푯말이 걸려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집 나간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다시 기억하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깨닫는, 즉 그러니까 아버지의 임재를 갈망하는 그 심령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하나님 없이 혹시 은밀히 즐기고 있는 죄악의 씨앗은 없는가?

 

하나님은 나에게 찾아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임재하시는가? 이스라엘처럼 진노로 임재하시도록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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