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에서도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있다(삿 1.16-36).

20211102-03(묵상)

  

 

 

가나안에서도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있다.

Jdgs. 1.16-36

 

    본문 관찰

 

    유다와 시므온의 동역(16-20)

    여러 지파들의 정복사(21-36)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27b)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29b)

       아셀 족속이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32)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34)

  

 

두 얼굴의 이스라엘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다.

하나님은 죄악의 도성 애굽에서 선민(選民) 이스라엘을 해방하사 당신의 말씀과 법도를 따라 친히 다스리시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예정이었다(15.7-21).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 가나안에서 생활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준다. 과연 여호수아 이후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오늘 본문은 이 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준다.

   

 

1. 승전가: 계속되는 정복2(17-20,22-26,35b)

 

유 다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17)

호르마’ - 완전히 멸한다.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점령하였고(18)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19a)

 

갈 렙(유다 지파)

헤브론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20)

 

요 셉

벧엘을 치려 올라가니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을 쳤으되(22-25)

단 자손이 정복하지 못한 아모리 사람들의 지역을 정복하여 노역을 시킴(35b)

   

 

2. 패전가: 실패 목록표(19b,21,27-36)

 

유다의 실패는 마치 도미노(domino, 19b) 현상과 같다. 실패는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해 보았는데 안된다는 것, 이것이 복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이라는 외적(外敵)과 동족 지파들의 실패라는 내적(內敵)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셈이다. 악화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을 이를 두고 하는 것 같다.

 

유 다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b)

 

베냐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21)

예루살렘에 함께 거주하다.

 

므낫세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27-28)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강성한 후에야 노역(종살이)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에브라임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29)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스불론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30)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여 사역(종살이)을 하였더라.

 

아 셀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31-32)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납달리

쫓아내지 못하고(33)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에게 노역(종살이)을 하였더라.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거주하였더니(34-35a)

 

1장은 유다의 승리에서 단의 실패로 일단락된다. 승리로(勝利路)로 올라가더니 실패로(失敗路)로 내려가는 이야기, 이는 사사기 전체의 그림을 예감케 한다. 가나안 사람들이 결심하고 약속의 땅에 거하더니(27b,29b),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다가(32), 급기야 그 땅의 주역(主役)이 역전되어 버리고 만다(34). 참으로 받아들이기 벅찬 기가 막힌 역전패(逆轉敗).

   

 

3. 화 근

 

그렇다면 왜 쫓아내지 않았을까. 이스라엘은 점점 쫓아내지 못하기도 했지만, 후에는 쫓아내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핵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순종이다. 싸움을 포기해 버렸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이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에 실현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한 순종을 포기한 불신앙이다. 단순히 땅을 더 얻느냐, 덜 얻느냐의 영토 확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이 가나안에 온전히 성취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포기한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는 영적 통찰에 실패한다. 영적 암흑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스라엘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다. 과연 사사기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포기해 버린다. 성경에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서서히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있다.

정복하여 얻은 것도 있지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앙적인 면도 있다- 동시에 쫓아내지 못하여 정복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불신앙이 함께 섞여 있는 '두 얼굴의 모습', 이것이 이스라엘의 몰골이다. 어찌 이스라엘뿐이랴. 나에게도 이와같은 양면성이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시에 악하고 게으른 종의 형상 역시 내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들과 공존해 버린다.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다가 보니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백성들이 편리(유용)한 면이 없지 않았다. 종살이를 시켜보니까 그랬다. 종들이 시중들어 주니까 얼마나 편한가. ‘세상방정식을 약간만 대입하면 문제가 얼마나 쉽고도 빠르게 풀리는가. 이것이 문제다. 조금 얻은 것에 취한 것이다. 조그마한 축복의 부스러기 맛을 알게 되니까 오히려 가나안(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했던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가나안에서도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하다. 가나안에 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죄악의 꽃은 필 수 있다. 주님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이루시지만 인생은 가나안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다.

이렇듯 세상과 혼합되면 거룩을 잃게 된다. 그러면 능력 역시 알은 낳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닭처럼 된다. 삼손이 거룩을 잃어버렸을 때, 그러니까 들릴라라고 하는 세상과 섞였을 때 그는 사사이면서도 능력은 없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이런 일이 가나안 안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요즘 식으로 하면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분리가 아니다- 모호해졌거나,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세상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가나안을 용납해 버린 이스라엘의 책임이다. 이스라엘이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본문을 잘 보면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그 땅에 거하였더니”(27,35)라는 사사기 기자의 통찰을 만날 수 있다. 거룩의 능력을 상실한 이스라엘(교회, 성도)을 세상은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지금 얻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다. 조그마한 축복 때문에 오히려 큰 축복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나에게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지금 얻은 것에 -이스라엘 식으로 말하면 정복한 것-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영원한 미래가 더 복()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 이것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안타깝다. 출애굽에 이어 홍해를 건너 광야교회를 지나(7.38, 고전10.1-4)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가나안이라는 복병 때문에 놓치고 있다.

지금 나에게 주신 축복이 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없는가.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했던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는 도구로 전락했다면 나 역시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처럼 부담이 되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꼭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반드시 쉬운 문제만 주어지거나, 이미 예전에 한 번 풀어본 문제가 다시 출제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새로운 문제, 그것도 행하기 싫은 -요나의 부르심이 그것이다- 방식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싫어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행하는 것이 영적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임무이자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다.

 

가나안에서도 영적 성장은 멈출 수 있다.

 

영적 성장이 멈추면 반드시 '대용품'을 찾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아닌 적() 가나안 사람들을 통해서, '적과의 동침'을 통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비극의 씨앗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화근은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1장 말미에서 우리는 이 올무의 세력이 거대한 힘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는다. 오히려 가나안이 이스라엘을 쫓아내는 '기이한 역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사사기가 증언하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신약교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성도들의 모습과 우리 시대의 성도들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 되는 이유는 뭘까? 사사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개입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이어질 것인가? 이것이 2장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이미가나안에 들어왔으나 아직가나안을 가나안 되게 만들지 못한 이스라엘, 가나안으로 하여금 가나안 되게 해야 할 거룩한 미션을 받았으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멀어만 보이는 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가나안은 가나안대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즉 성경은 성경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적 성장을 멈추게 만들었는가. 동시에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방해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2장에서부터 묵상해 볼 것이다. 죄가 무슨 모양을 띄고, 어떤 얼굴로, 어떤 식으로, 가나안으로 하여금 가나안 되지 못하도록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벧전5.8)으며 끊임없이 교회 앞마당까지 넘보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동시에 가나안에서도 멈출 수 있는 영적 성장을, 그럼 어떻게 계속해 갈 것인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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