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이 희망이다(삿 10.1-16).

20211123(묵상)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Jdgs. 10.1-16

 

    본문 관찰

 

    돌라가 일어나서 23년 만에

    야일이 일어나서 22년 동안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가나안)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18년 동안 억압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구원하게 하라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평화 45: 은혜의 끝에 배반을 심다.

 

아비멜렉의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요 부아의 아들 돌라가 23년을 사사로,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22년 동안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실로 오랜만에 45년 동안이나 평화를 누렸다. 성경은 돌라와 야일의 사사 기간을 몇 절로 짧게 요약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넘어간다(1-5).

한편 사사기는 사사기의 순환도 나타나지 않고, 지파 소속도 소개되지 않는다. 단지 자녀만 많이 낳고, 많은 재산(부와 명예)을 소유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봐 점차 사시기의 흐름이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4). 사실상 기드온을 정점으로 사사기의 구조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부자자효(父慈子孝)

 

이스라엘은 45년 만에 다시외출을 시작한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옛 성품은 까마득하게 잊혀졌을 법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니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 수 있고,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묵묵히 믿음으로 살아도 될성싶은 넉넉한 시간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 어두운 과거(옛 성품, 옛 자아)로 돌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45년의 역사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제(45)가 오늘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 역시 여기까지 온 것들이 아무 힘이 되지 못하고 무너지고 파선하는 건물이나 배처럼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신앙은 과거의 명성과 관록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더 없이 본문 앞에서 묵상해 본다.

문제(6-9, 여호와/여호수아 여호와+바엘/사사기가나안의 신들/사사기)에 대한 해답은 어디로부터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불화중인 인생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국면 전환을 시작할 용기를 준다. 만남은 대화로, 대화는 기도로, 기도는 회개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아들의 마음(10,15-16a)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10a)

 

바뀐 것은 없다. 단지 자신들의 문제의 원인을 발견한 것 뿐이다. 구체적인 삶의 질적인 변화는 16절에서 시작된다. 얼른 보면 이스라엘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처럼 상처받은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 나아간다.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묵상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의 짐을 해결한 후에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죄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남과 대화와 기도 앞으로 나아간다. 죄인과 하나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 역시 동일한 이스라엘의 몰골을 가지고 그분 앞으로 나아갔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뻔뻔하다 생각하고,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까.

그분은 지금도 의인이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찾아나옴을 이처럼 용납해 주신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분이시다. 나는 그 주님을 사랑하며, 때문에 비록 인정하기 싫지만 나의 추악한 실존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움과 한심함, ‘다시반복하는 죄() 목록표 앞에 다시설 수 밖에 없는 초라함과 못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용납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 “내가 나의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10b,15)

 

죄인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복되다: “나는 주님께 죄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동안 불레셋과 암몬이라는 인생 채찍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 하나는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인식이었다(8). 그럼에도 이처럼 다시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행동이 아니다. 나에게도 죽음보다 더 싫은 굴욕이라 생각들 때가 종종 있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데 나는 왜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실존 앞에 서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운지 모른다.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외에는, 이처럼 주님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독백은 그대로 내 기도가 된다. 하나님 밖에 내 희망이 없다는 절박함, 동시에 내가 이처럼 행동해도 날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리라는 희망,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통곡이 다시 그 아버지를 붙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 어떤 미사(美辭)가 필요할까.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16a)

 

진심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는 이처럼 행동한다. 비록 아버지가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애정은 아버지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슴(마음)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 꼴보기 싫다고 하질 않았니?”라며 책망하지 않으신다(16b). 부자(父子)의 관계는 아들의 못남 때문에 단절되지 않았으며, 동시에 아버지의 따끔한 회초리(13) 때문에 피차에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는 관계로 멀어져 있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와 같다.

지금은 나의 허물과 죄목(罪目)에 발목 잡혀 방문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패하며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처참하게 추락시키는 방식으로 자학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동정을 사고 측은함과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이런 처세를 반복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나의 변화된 모습을 조용히 행하는 것이 요구되는 때이다. 자기 고백에 충실한 삶이 소중한 때이다. 이것이 나는 변화되었습니다.”라는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낸다.

아버지께서 11-14절처럼 말씀하셨다 해도 15-16 상반절처럼 응답할 수 있는 사람,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아들이다. 지금은 아들이 아들 다운가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답지 못해도 아들이기에 이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동시에 아버지이시기에 아비의 마음으로 아들을 대면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11-14,16b)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

 

하나님의 부성(父性), 아버지의 마음을 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해 보라.”(13-14)며 일단 만남과 대화를 거부하신다. 사실 문자(文字)대로 이해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분명 아버지는 이번만은 그냥 묵과할 수 없음을 완곡하게 말씀한다. 사사기의 저자는 철부지 이스라엘의 기나긴 외출과 귀향의 끝없는 반복을 지겹도록 상대하시는 아버지를 소개한다. 못난 아들과의 인연을 끊으려는 아버지가 아닌 아들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시며 대화하시는 아버지, 이제 정신차리고 아들 본연의 자리로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너 꼴보기 싫다!”(13)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

이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아버지, 또 이 정도의 질책을 들을 수 있는 아들, 이 두 사이에는 사랑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모습으로 나를 대면해 주시는 아버지를 만난다. 말 너머에 있는 마음, 언중유골(言中有骨)과 같은 아비의 심정을 훔쳐본다. 탕자처럼 살았음에도 나를 아들로 상대해 주시는 아버지, 계속해서 대화해 주시는 아버지, 알 듯 모를 듯 한 표정으로 나의 최종적인 결단을 촉구하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말씀으로 대면하는 나의 마음은 콩당콩당 뛴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b)

 

인격자이신 아버지를 만난다. 만약 13-14절에 문자적으로 충실하신다면 16절과 같은 표현은 서로 모순된다. 이미 다시언행일치(言行一致, 15-16a)를 보인 이스라엘 아닌가. 죄를 따지자면 반드시 그냥 넘어갈 수 없고, 하지만 납작 엎드려 처분만을 기다리는 모습에서는 어떤 집행도 주저스러운, 그 중심에 서 계신 아버지를 만난다. 이분이 내 아버지시다!

나 역시 아비의 심정을 가질 수 있다면 본문의 아들 정도는 넉넉히 상대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보기 힘든 나의 좁쌀같은 마음이다. 입이 열이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아들 이스라엘을 만나주시는 아버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지막으로는 근심으로 마음을 달래시는 아버지, 나는 소망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기를! 비록 아버지께 근심밖에 해 드린 것이 없어도 그분이 나의 아버지됨을 인해 무한하게 깊어지는 아버지를 향한 나의 마음,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이길래 나를 인해 근심하실까 생각하면 아직도 이 못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마음에 품으시고 계시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사기의 하나님, ‘사사기 교회를 담임하시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나도 아버지처럼 목회하고 싶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어떤 아들도 용납하며,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사사기의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는다. 사사기의 아버지는 희망이다. 그래서 사사기도 희망이다. 사사기 교회를 순회하는 지금, 나도 이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이 마음 가지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무릎을 조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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