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에도 가시나무는 자란다(삿 9.7-21).

20211120(묵상)

  

 

 

가나안에도 가시나무는 자란다.

Jdgs. 9.7-21

 

    본문 관찰

 

    요담의 산상설교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감람나무에게...

       무화과나무에게...

       포도나무에게...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가시나무가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진실과 의로운 일이면...

       그렇지 아니하면 불이 나와서 사를 것이요

  

 

요담의 그리심산 설교

 

사사기의 무대는 애굽이 아니다.

반대로 가나안이다. 가나안은 어디인가? 단순한 땅(영토)의 의미만이 아니다. 여기는 애굽이라는 옛 지배의 품으로부터 약속이라는 새로운 통치의 품 안으로 들어온 풍성한 언약의 땅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그냥 형통과 행복과 기쁨과 축복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늘 소위 요담의 저주’(57)를 대하면서 받는 느낌은 가나안 역시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면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 세례를 받았다, 성도가 되었다는 이런 것들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놓치면 가나안에서 마음대로 사는 이스라엘처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화 없이, 성숙함 없이, 거룩함 없이 떳떳(뻔뻔)하게 살아가다가 아베멜렉과 세겜의 백성으로 전락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큰 그림이다.

   

 

그리심 선언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7b)

 

요담은 누구인가?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있다면 그가 기드온의 70 아들 가운데 하나이며, 아비멜렉의 정변 때 그의 손에 죽지 않고 피신했다는 것 밖에 아는 바 없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이 모두 아비멜렉의 손에 의해 죽은 사실을 알고서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과 아비멜렉에 대해 예언을 하였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빈약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분문에 나타난 요담은 매우 균형잡힌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아비멜렉과 같은 방식으로 쿠데타같은 그런 정변(政變)의 악순환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는 사사가 되려고 어떤 수를 노리지 않았다. 그의 예언(저주설교, 57)을 들여다보면 그의 건강한 사고방식과 신앙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요담은 사심(私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담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세겜과 아비멜렉을 향한 바른 선언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한 시대의 영적 기상도(氣象圖)를 보고 읽어 낼 수 있는 정확한 ’(insight)이 필요하다.

 

1. 아비멜렉은 가시나무다(8-15).

 

요담의 통찰은 아주 정확하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요담의 예언에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다(8-13). 그리고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 역시 등장한다(14-15). 전자(前者)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주제), 임무(책임), 사명(역할)을 지킨다. 그리고 후자(後者)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람이다.

문제는 감람(포도)나무인데 가시나무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시나무인데 포도(무화과)나무처럼 살고 싶은 사람이다.

 

2. 세겜은 죄를 지었다(16-18).

 

죄는 내부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내부의 적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성도가 성도를 시험들 게 만드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요담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세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한다. 그들은 여룹바알(기드온)을 잊었다. 사람들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이다. 성도들에게서 은혜가 떠나면 나타나는 현상은 포근하고, 따뜻하고, 정감스러운 것들은 없어진다. 반대로 딱딱하고, 차갑고, 찬바람이 불어온다. 이처럼 은혜가 약해지면 그것만큼을 율법이 들어와 그 많던 감격과 감사와 눈물과 기쁨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지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가나안 시대사사기의 사람들을 보라.

또한 세겜 사람들은 지역주의에 편승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모친이 자기들과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용납하였다.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면 어느 때나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방식들이 기승을 부린다.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역패권주의 아닌가. 이것은 나라를 망치는 독()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에도 경상도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가 있고, 전라도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가 있다. 더 한심한 것은 특정 지역 출신은 목회자로 모시지 않는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교회에나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도 이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다. 교회가 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지역주의에다가 혈연, 학연까지를 잘 요리해서 끼리끼리 모여 다니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교회의 영적 생명은 끝이다.

 

3. 세겜과 아비멜렉은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19-21).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분명하게 갚으신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잡았으니 아비멜렉의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그를 대항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역사는 뒤로 퇴보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폭정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만 같다. 어찌된 것이 기드온 가문이 이스라엘을 치는 사람 막대기이자 인간 채찍이다.

한편 요담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자마자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는 예언 이후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일할 때를 알았고, 물러날 때를 알았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자신의 힘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았다. 흔한 말로 주제 파악이 된 사람이다.

요담은 결코 아비멜렉 이후에 대한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는 그리심 선언이라는 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그는 나무의 열매까지를 자신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 우는 범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마무리, 참 소중한 준비가 아닌가. 자신은 심는 자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분명히 한다.

요담은 과연 이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날 것인가를 침착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여기까지다.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를 내가 하려고 낑낑거리지 않고 좀 더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다리는 여유, 이것이 급하고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붙들어야 할 지혜가 아닐까.

   

 

부스러기 묵상

 

나의 가나안,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생명으로서 나는 건강한가?

요담의 그리심산 선언을 들으면서 나를 돌아본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 세겜 사람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 혹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선포했던 그리심산(8.30-35)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게 하는 죄는 없는지, 때때로 나에게도 요담 같은 사람을 세워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나는 요담처럼 어떤 불이익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생명 걸고 죄와 악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꿈이 가나안(공동체)에 이루어지도록 헌신하고 있는지...

가나안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세겜 사람들, 아비멜렉, 요담이다. 가나안인데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내게는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사람들은 가나안(교회)을 가나안(교회) 되게 하는 일에 실패하며 살아갈까? 왜 가나안에서 망할까.

하나님은 가나안(교회)을 이렇게 만들어도 좋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언제부턴가 요담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자리로 후퇴해 있는 나를 대면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가나안에 가시나무가 자라는 죄를 넘어 어느 날 뿌리까지 뽑히는 가시나무로 끝나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아야겠다. 그러기 위해 마귀와 시험과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逸樂)이라는 가시나무들을 제거함으로써 좋은 땅으로서의 가나안으로 끊임없이 거듭나는 이 거룩한 소명을 묵묵히 감당해 보자(8.4-15 참조). 가나안으로 가나안 되게 하는 은혜를 다시금 구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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