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자 기드온(삿 6.11-16)

20211113a(묵상)

  

 

 

새신자 기드온

Jdgs. 6.11-16

 

 

    본문 관찰

 

    여호와의 사자 vs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너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 vs 기드온

 

역사는 하나님이 찾아오심에서 비롯된다.

세속에 속한 종교들은 자기 스스로 신이 되거나 -득도(得道)라고 하나?- 훈련하고, 연습하고, 교육하고, 터득하고, 그래서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그런 방식을 취한다.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이다. 모든 세속 종교는 이처럼 인간이 신이 되거나, 신을 찾아감에서 종교성을 확장하고 또 만들어간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신(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의 자녀가 되는 방식을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추측이나 가능성은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탐욕의 소산일 뿐이다.

7년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을 어느 날하나님께서 가나안을, 그리고 그 가운데 기드온 한 사람을 찾아오셨다. 이 경사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요 역사다. 그 역()은 결코 불가능하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처럼 한 사람을 찾아오시며, 한 사람을 주목하시사 당신의 계획을 알리시며, 그 일을 성취하신다.

 

체념한 기드온(11-12)

마침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의 시선을 피해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읽었듯이 모든 토지 소산을 멸하는 미디안의 눈을 피하여 소출을 했다는 점, 이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단순히 먹는 것이 얻어지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드온은 현재 미디안과의 대결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홀로! 만약 미디안에 발각이 되면 밀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위태롭게 될 것은 뻔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타작마당에 서 있다.

바로 그를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마침내 여호와의 사자와 기드온 사이의 만남, 그리고 둘 사이의 대화가 시작된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와 한 첫 선언이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 앞서 기드온이 누구인가를 살펴본 이상 그는 큰 용사는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아니, 거기까지 기드온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 생각해 보자. 고린도교회는 참 문제 많은 교회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교회를 -아니 하나님이 이렇게 불러 주신다. 이를 칭의(稱義)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고전1.2a)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시각이요 하나님이 이처럼 불러주심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것이면 전부다. 기드온이 이처럼 부름을 받기 위해 우리 식으로 이해하는 어떤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더 깊게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이처럼 부르심을 받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찾아오심, 그분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어느 정도 노력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그것이 기특해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말하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식의 신인협동(神人協同)은 비성경적이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착각하는 기드온(13-14)

여기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13)은 대답치고는 상당히 많은 부분 주어 생략이다. 다짜고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거침없이 토해낸다. 그렇다면 비록 미디안을 피해 밀을 타작하고는 있어도 그의 가슴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문)들로 가득차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이전에 그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인간이다. 질문은 우리가 만들지만 해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기드온의 질문은 한 마디로 이렇다: “어찌하여 지금은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무수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황량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응시하지만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걸까라는 물음표뿐이었다. 생각은 있으나 힘은 없고, 뭘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생, 그가 기드온으로 대표되는 인생들의 빛바랜 이력서 아닌가.

 

소심한 기드온(15-16)

하나님은 이어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b)라고 말씀하셨음에도 기드온은 오히려 옛적에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0-13)라고 씩씩거렸던 모세처럼 주여 내가 무엇으로, 나는 극히 약하고 나는 가장 작은 자니이다.”(15)라고 하나님께 고개를 들고 말을 받아내고 있다.

본문을 잘 보면, ‘우리에서 로 기드온의 말이 변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하나님은 줄곧 로 기드온을 상대하신다. 기드온은 는 못한다고 항변하고 있고, 하나님은 는 할 수 있다고 격려하시는 모양세로 전개된다. 신인(神人)의 대화치고는 참 묘하다. ‘우리에서 로 이동하는 기드온의 교만함에 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오직 기드온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반복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점점 기드온을 향한 집념의 끈을 좁혀 오고 계시고, 가능하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팔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긴장이 본문에 흐르고 있다.

기드온, 그는 분명 초신자다. 그는 민족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질문은 있었으나 그 질문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에 이루어야 하는 사명자로서의 의 소명은 대답(감당, 응답)하고 싶어하지 않는 약한 용사에 불과하다. 말은 많지만 능력이 없는,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믿음이 없는 기드온, 그는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이다. 한편 기드온의 나이가 청년을 지났을 것으로 생각해 볼 때 그는 성장이 멈춘 성도라고 할 수 있다. 부르심을 입은 오늘이 초신자로 시작하는 날이 아니라 수 십년을 믿었으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초신자, 그러니까 장농 면허처럼 면허증은 녹색인데 실재는 초보 운전인 사람처럼 그의 영적 눈높이는 아직 초보 신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주목하시며 찾아오셨다. 하나님께는 초신자여도 상관이 없다. 아직은 초신자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가 이미 큰 용사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이 역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간격이며 질적 차이다.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하신다. 다 준비된 기드온이 아니라, 이미 큰 용사인 기드온이 아니라,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고전13:2)으로 무장된 영적 군사가 아니어도 좋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심은 그가 당신의 명령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생명을 걸 수 있느냐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이런 이유 때문에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다. 기드온과 하나님의 차이만큼이나 나 역시 하나님과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엄존함을 인정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다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닌가. 이 은총 앞으로 나아간다.

   

 

부스러기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 역시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기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초신자입니다.

나 역시 나의 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입을 놀리며 사는 그런 부끄러운 초신자입니다.

내가 나를 초신자로 깨닫지 못할진데 내 어찌 하나님께 소망이 있겠으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인생이리이까.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주님!

 

내가 나를 봐도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시고 이런 은혜를 허락하시나이까.

나의 허물과 죄악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으나

여전히 의인된 죄인인 저를 그래도 자녀라 부르시고 택한 그릇으로 써 주시니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기드온의 이중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

역시 저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이 낱낱이 드러남으로 해서

아버지 앞에 저는 벌거숭이로 서 있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 내 열심히, 내 능력으로,

알량한 내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아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함을 십자가 앞에 버리겠습니다.

주여! ‘기드온이 쓰임 받는다면

나 정도야 그러고도 남지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다 씻어 주옵소서.

이와 같은 모습임에도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자녀 삼으심을 인해 주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

 

초신자 기드온처럼

나 역시 초신자의 자리에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

다시금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며 주 앞에 있사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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