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사람들Ⅰ(삿 5.10-18)

20211110b(묵상)

  

 

 

두 종류의 사람들()

Jdgs. 5.10-18

 

    본문 관찰

 

    시스라 전투에 참예한 지파들(14-15a,18) - A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

    시스라 전투에 불참한 지파들(15b-17) - B

    르우벤, 길르앗, , 아셀

  

 

두 종류의 지파

 

어느 시대나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드보라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앞에 믿음으로 동참한 지파들(A)이 있었던 반면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달아 자라목처럼 치열한 전투 가운데서도 슬그머니 숨어버린 비겁한 자파들(B)도 상당수 있었다. 이미 지난 과거에도 사사를 세우사 승리하게 하신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피동적인 사람들, 전쟁을 구경하는, 아니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강 건너 불을 보듯 구경하는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신앙공동체 안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역시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믿음으로 나아갔던 출애굽의 후예들을 만나는 기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편에 선 자들인가를 돌아본다.

   

 

14-15a,18

 

시스라 전투에 참예한 지파들(A) - 에브라임, 베냐민,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에브라임은 비록 아말렉에 뿌리 박은 자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아말렉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 일은 베냐민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 에브라임의 뒤를 따르게 된다. 이처럼 좋은 영향력을 흐르게 하고, 다른 사람 역시 복을 받도록 하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그런 쓰임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또한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스불론 장교들이, 또 잇사갈의 방백(지도자)들이 여사사 드보라와 함께 한 것은 참 감사할 대목이다(14-15a). 오늘로 말하면 평신도들이 아니라 중직자(리더십)들이 솔선수범(率先垂範)해서 모범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이 공동체가 건강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지 윗 사람들이 하는 헌신과 수고는 참으로 소중하다.

진리 편에 서는 용기와 결단,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고 그 역사의 현장에 서는 사람, 다시금 하나님의 뜻이 가나안에 회복되는 것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성취해 가신다.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은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18a) 하면서까지 전쟁에 참예했다. 자기 생명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드보라의 마음을 가지고, 아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죽음도 불사하는 결단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이후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역시 자신을 돌아볼 수 밖에 없는 말씀이다.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사수하고, 교회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결단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3)- 우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처럼 살도록 만들었을까?

사람은 평안할 때는 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사(生死)를 건 문제 앞에 서면 그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허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15b-17

 

시스라 전투에 불참한 지파들(B) - 르우벤, 길르앗, , 아셀

 

르우벤 지파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드보라는 매우 탁월한 영감을 통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지파들 때문에 승리의 분위기가 위협받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만큼은 그냥 승리 속에 묻어두지 않고 적절한 어조(語調)로 슬쩍 공개한다: “어째서 너희는 양의 우리에 앉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만 듣고 있는가?”(16a, 현대인을 위한 성경)

또한 요단 저편에 멀찍이 머물러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그리고 단은 배에 머물러 있었고, 또한 아셀은 해변의 자기 항만(시냇가)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17). 그러나 이들은 승리의 함성이 찬양이 온 이스라엘 안에 가득한 이 날에’(1)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을까? 덩달아 좋아하고, 기뻐하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한 일 없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을까.

사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꿈쩍하지 않는 성도들이 왜 없겠는가. 한 공동체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데 동상이몽(同床異夢)도 유분수가 아닌가. 비아냥거리지나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승리는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전쟁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와 같은 그런 동화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드보라의 멋진 여유와 깊이를 만난다. 그것은 결코 비주류를 비난하거나 저들의 허물을 들추어서 불이익을 주거나, 혹은 소위 말하는 선지자적 저주와 같은 그런 화있을찐저는 나타나지 않는다. 얼마나 귀한 승리자의 여유인지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더 추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드보라에게서 배우는 것인데 내가 잘한 것이 결국은 남이 못한 것을 비난하는 그런 쪽으로 사용되는 것, 그것은 막아야겠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기가 잘나고 똑똑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소년은 장난삼아 연못에 돌을 던질지 모르지만 그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는다.

드보라! 그녀는 묵상할수록 삶의 전 영역이 골고루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다.

   

 

공존의 그늘

 

오늘 본문과 유사한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만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과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은 동일하다(2.37,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런데 베드로의 청중은 3천명이나 세례를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는 사람들로 나아간다(2.38-42). 그러나 스데반의 청중은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7.55-60). 이렇듯 초대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사 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지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여전히 가나안에 공존하고 있었듯이 -노아시대에도 그러했다- 바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은혜를 받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이것도 말씀이냐는 식으로 교만한 무리들이 한 공동체 안에 섞여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무리인가? 정말 중요한 묵상이다. 동일하게 더 중요한 질문은 음지(陰地)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드보라의 영성을 새롭게 조망해 보아야 할 부분이 이것이다. 어차피 자기 길 자기가 간다고 방치하기에는 그들 역시 소중한 영혼들이 아닌가? 함께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몫이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도전과 함께 거룩한 부담을 숙제로 받는다. 하나님의 공동체인 포도원을 허는 여우들의 날뜀을 방치하다가는 꽃이 핀 포도나무까지 상하게 될지 모르는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의 생존 뿐만 아니라 어떻게 공동체(포도원, 교회, 가정)의 건강을 지켜나갈 것인가? 드보라의 헌신과 승리 이후의 영성에서 조그마한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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