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은 죽어서 말한다(삿 16.23-31).

20211203b(묵상)

  

 

 

삼손은 죽어서 말한다.

Jdgs. 16.23-31

 

    본문 관찰

  

    23 블레셋 방백들 -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 -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8 삼손 -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31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사서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20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 변주곡 제3악장 - finale

 

삼손의 몰락 앞에 망연자실(茫然自失) 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사사들은 그의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삼손의 사사 재임 20년은 여전히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었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스라엘은 오히려 블레셋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삼손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였다(15.9-13).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사명(13.5b)에 충실하지 못하고 불충(不忠)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25a)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25b)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세상의 노리개가 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삼손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으로 서글픈 모습이다. 그는 두 눈이 뽑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한다(21). 그러다가 끝내 광대가 된다: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25)

언제부터 사사의 사역 가운데 재주부리기가 포함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재주를 부렸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눈 뽑혀 놋줄로 묶인 모습에서 나온 재주가 뭐 대단했겠는가. 그가 진실로 해야 할 재주는 이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마 이것이 맛 잃은 소금이지 싶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한편 이미 하나님이 떠난 인생의 모습을 그려본다. 자신이 몰락하는 것은 물론이고(21,25-27), 민족과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을 받고 있는(23-24), 죽을 때까지 사사(나실인, 31, 13:7)이지만 이처럼 살 수 있다는 점, 이게 어찌 삼손만의 딜레마겠나 싶어 혼돈스럽다. 인격(성장과 성숙, 건강한 삶)과 무관한 사역(능력, 사사, 나살인)이 과연 가능하겠으며, 설령 그런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28a)

 

철들자 죽는다.”는 말은 삼손을 두고 한 말 같다. 삼손 변주곡은 사실상 끝났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심으로서(20), 그리고 그가 활동해야 할 무대가 블레셋 백성과 그들의 모임(23- )으로 옮겨지면서 사실상 그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역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사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삼손 변주곡의 절묘함은 삼손의 기도와 사사로서의 인생 마무리로 끝맺음하고 있는 부분이다(28-30). 모두 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무대를 외면할 즈음 삼손의 솔로(solo)가 처절하게 시작된다. “여호와여!”로 시작되는 삼손의 외침은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고, 어떻게 살아야 했으며, 또 어떻게 생을 마쳐야 하는가에 대한 생애 최후의 긍정이자 선포이며 순종이요 헌신이다: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13.7b)

그랬다. 그는 죽는 날까지나실인이다. 비록 수준은 아니었어도 그의 신분은 분명한 나실인이다. 이게 성도의 정체(identity)가 아닌가. 비록 답지 못해도, 그래서 평생 거룩한 신분을 망각하고 마음대로 살았어도, 비록 의롭게 살지는 못했어도,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죄로 뒤범벅이 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어도 그는 분명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 즉 하나님의 자녀다. 이 기막한 역설적 삶을 우리보다 조금 먼저 경험하며 살았던 성도가 바로 삼손이다. 결국 삼손에게는 성도의 인생 파노라마(panorama)가 그대로 노출된다. 나와 삼손의 차이는 나는 그게 다 비밀처럼 지나가고 있지만 삼손은 그게 다 공개된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손은 살아있다.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삼손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가.

삼손은 실패하고 넘어졌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블레셋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았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23-24)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실패자 삼손,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 앞서 자기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최후의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삼손의 실패보다 더 크고 위대한 승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삼손을 비참함에 방치(유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못나고 자격 없는 그였지만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28a)-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셨다. ‘진작 이렇게 살 것이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삼손 변주곡이 이렇게라도 마무리 되도록 하신 것만으로도, 이렇게 해서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 동안 지냈더라.”(31b)며 그의 파란(波瀾) 많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애 전부를 사사로서 살았다고 인정해 주시는 은혜만으로도 -나 역시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 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의인된 죄인으로 살고 있다- 삼손 변주곡의 가치는 충분하다.

   

 

부스러기 묵상

 

시편 137편으로 가 보자.

바벨론 포로가 되어 바벨론 강가에서 슬픈 노래로 망향(望鄕)의 한을 노래하는 시인은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137.1-4)

이처럼 바꿔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가나안 교회의 뜰 여러 곳에 앉아서 삼손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삼손을 사로잡은 블레셋 백성들이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도록 청하며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한 자가 즐거움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라 함이로다. 성도가 블레셋 다곤 신전에 있어 어찌 재주를 부릴꼬.”

그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13.7b)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지금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20b) 때에도 여전히 신분은 나실인이다. 하지만 그의 수준, 영적 상태, 내면세계는 깨어지고 망가졌다. 그는 처참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시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없어지고 끝난 참담한 지짐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셨음을 알았을 것이다. 참 씁쓸한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을 받는 것과, -더더욱 다시 쓰임을 받는 것을 포함할 때 더욱 놀랍다(28- )- 그것이 그의 영적 세계와 성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할지 사뭇 혼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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