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11(묵상)

  

 

 

전쟁일기(戰爭日記)

Jdgs. 20.12-23

 

    본문 분석

 

    이스라엘의 결의안을 거부한 베냐민 지파(12-16)

    전쟁: 이스라엘 연합군의 패배1(17-23)

  

 

베냐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12)

이스라엘이 기브아의 밤을 악행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분명 악()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13절처럼 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바른 수순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냐민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13b-14) 이것이 베냐민의 실상이다.

악을 악으로 느끼지 못하고, 악의 편에서 살아가겠다는 베냐민의 선택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디까지 추락해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베냐민 지파의 몰락은 서서히, 그러나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지난 기브아의 밤에 14절과 같은 자세로 불량배들과의 전쟁을 치뤘어야 옳다. 그런데 악을 제하여 버리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정작 일해야 할 때는 나 몰라라수수방관(袖手傍觀)하더니 회개와 자숙으로 긍휼(矜恤)히 여김을 받아야 할 때는 오히려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꼴, 사실 이처럼 사는 사람이 베냐민 공동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둔감해 지면 누구든 베냐민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정말 말하고 일하고 섬기고 헌신을 필요로 할 때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37.1)처럼 지낸다. 이런 사람들 일수록 베냐민 지파처럼 정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울리는 꽹과리(고전13.1)가 된다. 마른 뼈에서 나는 소리, 그것은 생명 없는 뼈들이 부딪혀 내는 잡음(雜音)일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야 할 소리는 이 소리가 아니다.

한편, 베냐민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를 때가 아니다. 26,000명의 군사와 700명의 물매로 돌을 던지는 소위 물매총만을 믿고 의지할 때가 아니다(15-16). 이것들이 죄로부터 자신들을 결코 구원해 내지 못한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육신의 무장과 힘은 영혼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한다. 따라서 불량배들의 반란을 목격하면서 무너진 자신들의 영성에 대해 자성과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인식이 우선했어야 했다. 그러나 베냐민은 가장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잃어가고 있다.

마침내 한 사람 레위인의 죄는 기브아를 지나 베냐민 지파 전체에게로까지 자랐다. 베냐민은 기브아에서 이 죄가 멈추도록 할 수 있는 기회(특권)를 의도적으로 상실한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셈이다. 그 결과 이런 막 되 먹은 친구들이 기브아의 뜰을 마음 놓고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이런 못된 염소들이 푸른 초장을 황무지로 만드는 주범(主犯)들이다. 이처럼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가 옳고 정당한 줄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망나니로 살아간다. 이와같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흔적은 우리 시대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18a,23a)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쭙는다. 참 잘 한 일이다. 마침내 불량배들과의 기브아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가 읽어가는 전쟁일기(戰爭日記)에는 당연히 승리하리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이 그만 패배한다. 그것도 40만의 군사가 단지 26,700명의 군사 앞에서 무려 22,000명이나 전사(戰死)되면서 말이다. 어찌된 일인가? 일기에는 그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아쉽다. 그래서 좀 더 왜 이런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공식처럼 진행되었다(18-21). 그런데 모범답안(模範答案)이 아닌 최악의 성적표가 주어졌다(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성적표를 받았을 때다. 왜 이런 대접을 하시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우리 역시 이런 실패의 그림이 그려진 것이 그대로 주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 보다 하나님이 분명 응답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을 때, 어떻게 그 이후를 풀어가야 할까?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서 하나님으로

 

악을 심판하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전쟁만이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혹 이스라엘에게 없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 마치 자신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우연히 22,000명의 이스라엘이 희생되었다고 볼 수 없다. 18절 뒤에 21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거기에는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그들을 베냐민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것은 아니었다. 너희들도 말씀을 떠나면 이렇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베냐민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명분이 있고, 내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꼭 승리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22)어 나아갔다는 것은 21절의 이유를 전혀 상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 앞에 둔감해 있었고, 자기 의와 열정으로만 베냐민을 상대하고 있었다. 실패를 단순히 실패로만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시각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에게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18)에서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23)로 시각이 달라졌다. 한 번의 실패에서 이 정도의 성찰을 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은 그래도 건강한 셈이다. 많은 경우 실패하면 좌절하고, 슬퍼하고, 죄 의식과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포기하고, 급기야 무너져 버린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실패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시각,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부스러기 묵상

 

살다 보면 어떤 일의 전면에 부각될 때가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렇다. 때문에 그때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잘 나고, 똑똑하고, 거룩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실 뿐이다. 그 자리에 올라설 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의 미끄럼틀을 타고 하강곡선을 그리며 추락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자기 힘(energy)으로 유지되거나 일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첫 번째 실패에서 교훈 받아야 할 점은 이것이다.

한편, 베냐민은 승리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40만 대군과 대항하여 불과 26,700명으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점은 이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흐름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로 보건데 이처럼 승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승리는 다 좋고, 실패는 다 나쁘다는 생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관점이 아니다. 승리에서 실패를 시작하고 있는 베냐민, 반대로 실패에서 승리를 시작하고 있는 이스라엘, 이 두 역설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가를 주목한다.

전쟁일기(戰爭日記) 전반부를 읽으면서 베냐민과 이스라엘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내용으로는 이 모든 일이 혼돈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 혼돈의 일기라는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이러한 시각이 주류를 이룰 때 나 역시 이 두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승리의 일기를 쓸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하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각이다.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는 그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느냐와 깊은 함수관계에 있다. 그래서 베냐민의 시각으로 가는 것은 실패다. 따라서 베냐민과 이스라엘이 동일한 사건 안에 있지만 -본문은 이 사건이 전쟁이다- 이스라엘과 같은 시각으로, 그러니까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일체의 비결(秘訣)을 배웠노라.”(4.12)는 사도의 시각처럼 하나님을 보는 영적 무게 중심을 가지고 일련의 흐름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眼目)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다시 나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어떤 사건을 통과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떻게 그 사건을 통과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교훈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나의 일기(日記)는 건강한가? 동시에 바른 방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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