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삿 17.1-6).

20211204a(묵상)

  

 

 

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

Jdgs. 17.1-6

 

    본문 관찰

 

    2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3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4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미가는 가정교회를 세운다.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본문 이후는 사사기 안에 있는데 정작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17-21장은 사사시대에 발생했던 일을 기록한 일종의 부록(附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렇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21.25) 마침내 제5복음서와 같은 자기복음서가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사사기 교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다. 가나안의 혼돈(Chaos)은 곧바로 우리 시대의 영적 혼미와 연결되어 더욱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본문을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 식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가의 어머니는 부요한 사람이다. 은화 1,100개를 잃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도둑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한다. 그런데 도둑이 다름 아닌 자기 아들 미가였음이 자백에 의해 밝혀지자마자 다시 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어머니는 두 신상을 만들기 위해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3)는 간증과 함께 그 은화를 아들에게 주고, 아들은 도로 어머니에게 주었으므로 어미가 은화 200개로 교회 설립을 기념하는데 필요한 성물을 만든다(4). 마침내 미가는 자신의 집에 자신의 가정교회를 개척하고, 자기 아들에게 제사장 가운(gown)을 입혀 그를 담임목사로 세운다(5). 이에 대해 사사기 기자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6) 행하는 한 예로써 미가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밝힌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참으로 가관이다. 악이 선으로 둔갑하는 것도 순간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도 순간이다. 그리고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교회거룩히”(3b) 세우는 것 역시 순간이다. 내 눈에는 이것이 또한 악한 방법으로 얻은 돈을 헌금이라는 창구를 통해 위로 받기를 원하고, 종교적으로 미화(합리화)시키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 미가의 후예들의 원조(元朝) 쯤으로 보여진다. 또한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7.9-13)라고만 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의 조상이 이 미가가 아닌가 싶다.

교회는 이처럼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돈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마음대로 제사장(사역자)을 세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기야 요즘에는 자기 스스로를 사역자로 임명하고 적당한 모임 만들어서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종교적 모양새를 꾸며서 결국은 자기 좋은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만큼은 자기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가는 이 넘어설 수 없는 규례를 자기 아들로 세워버림으로써 적당하게 처리하고 만다. 이로써 완벽한 구색은 다 갖추어진 셈이다

미가는 평신도 지도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제사장도 만들어 버린다. 평신도가 제사장을 만들고 세우는 교회! 이게 지금 에브라임에 세워진 미가의 가정교회의 실상이다. 평신도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지만 제사장 문제는 좀 복잡하다. 똑똑하게도 미가는 이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를 제사장으로 임명해 버리는 요즘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게 보이지만 일단 제사장을 세워 놓으면 구색은 다 갖춘 것이니까 그 다음이 문제인데, 이어지는 본문을 읽어보면 막후에서 제사장은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 놀랍지 않는가. 꼭 오늘날 교회를 보는 것 같지 않는가.

평신도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미가의 꼴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평신도가 주장하는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사사기는 근본적으로 교회론이 흔들리고 있는 공동체다. 영적 질서도 없고, 목회 리더십도 없고, 자기들 마음대로 목사를 세우고, 세워 놓고 또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유지하고, 설립 멤버들에 의해서 철저히 유린되는 에브라임의 미가 교회, 그렇다면 이 교회는 결단코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탈을 쓴 모리배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교회를 유린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필요하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제사장도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제 멋대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 자기 패거리들이 주요 직을 다 차지하고, -제사장도 자기 아들이다-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사람들, 이게 다 사사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추악한 자화상이 아닌가. 이게 목사다운 목사, 평신도다운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의 찌꺼기가 아닌가.

   

 

에브라임에 세워진 미가의 가정제단

 

은화 1,100개를 들여 세워졌으니 얼마나 화려하겠는가. 뒤에 나오는 돌팔이(사이비) 제사장의 연봉이 은화 10개였음(17.10)으로 보아 이 액수는 가히 어마어마한 헌금이다. 그런데 이 교회를 보면 왜 사람 냄새만 날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최선을 다 해 설립했는데 시장 바닥처럼 왜 사람들로만 북적거리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의 본산(本山)이 되었을까?

있을 것은 다 있지 않은가. 돈 많은 성도도 있고, 교회를 한 집에서 맡아 세워 버릴 정도로 대단한 헌신의 사람들이 있고,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도 있고, 거기에 제사장까지 청빙을 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아닌가. 더더욱 이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이들은 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을 받기 원하고 있고, 거룩하기까지 하다(3). 그런데 왜 이 교회의 설립과 진행 역사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아프고 쓰릴까?

교회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으면 마음대로 세우고, 마음대로 교역자를 임명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종교놀음을 하고 있을까? 사사가 더 문제지만 가정교회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당당하게 세우는 미가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자행되는 곳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가나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나 역시 충분히 이러고도 남을 만큼 타락타기를 신나게 즐길 수 있다. 가나안을 보면 실망 뿐이다. 사사도 백성들도 모두가 다 이상한 냄새만 난다.

미가의 교회를 방문하면서 타락한 예루살렘 교회를 바라보시며 우셨던 주님을 생각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23.37-39)

산산이 부서진 당신의 몸을 보시면서, 이미 죽은 가짜 몸을 붙들고서 그걸 교회라고 세워 놓고, ‘복 주세요!’라며 하나님 앞을 기웃거리는 추악한 인생들의 몰골을 대면하시면서 주님은 우셨다. 어쩜 그런 나를 보시면서 지금도 우시는 주님은 아닌지 겁이 난다. 제사장은 있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그것도 허수아비처럼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며 자리나 지키고 있는 무명의 제사장이 어쩌면 나의 그림자가 아닌지 정말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부스러기 묵상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b)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결국은 사욕을 쫓아 자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면 이게 미가와 다를 바 없다. 수단이 목적(원리, 근본)을 삼켜버린 세상,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 그러면서도 이를 교묘한 종교적 색깔로 덧칠한 세상, 이게 사사기교회 안에 개척된 미가교회의 실상이다. 그야말로 모양(무늬)만 교회인 교회가 멋지게 세워졌다. 그런데 계속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으로 강화되어 간다.

한편 자기 소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 나도 은 10개를 연봉으로 주겠다고 하면(10)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고 넙죽 청빙을 받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도 성공, 부흥, 성장으로 채색된 소위 목회 성공의 빛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언제든 성경까지도 자기 소견의 잣대로 무력하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져 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앞에 뭘 숨길 수 있으랴! 이러고도 미가교회를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자인가.

정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다. 미가와 그 어머니처럼 살아서는(교회 개척), 그리고 미가의 아들처럼 살아서야(목회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이런 모전자전(母傳子傳)엔 희망은 없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 종국에 가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바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 줄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하나님까지도 자기 소견대로 움직이려는 사람, 하지만 그들은 가장 종교적일 뿐이다. 이게 사사기의 실상이다.

 

   

제목 날짜
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07
총회일기.總會日記(삿 20.1-11) 2021.12.07
폭행일기.暴行日記(삿 19.16-30) 2021.12.06
애첩일기.愛妾日記(삿 19.1-15) 2021.12.06
미가와 단 지파의 인생이력서(삿 18.21-31) 2021.12.02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1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1.29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1.29
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삿 17.1-6). 2021.11.29
삼손은 죽어서 말한다(삿 16.23-31). 2021.11.29
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삿 16.15-22) 2021.11.29
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삿 16.1-14). 2021.11.29
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삿 15.14-20). 2021.11.29
블레셋 바이러스(삿 15.1-13) 2021.11.29
삼손 에피소드1(삿 14.1-20) 2021.11.24
삼손이 오고 있다(삿 13.15-25). 2021.11.23
잠자는 40년을 깨운다(삿 13.1-14). 2021.11.22
에브라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삿 12.1-15). 2021.11.22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까?(삿 11.29-40) 2021.11.22
입다에게서 듣는다(삿 11.12-28).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