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삿 16.15-22)

20211203a(묵상)

  

 

 

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

Jdgs. 16.15-22

 

    본문 관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20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 변주곡 제3악장 - 계속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지루한 주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릴 수 밖에 없다. “삼손 너, 신분만 믿고 개차반처럼 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가 아니다. 이것은 삼손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누구든 삼손처럼 살 수 있다는 긴장이 삼손 변주곡 제3악장 후반부에서 느끼게 되는 분위기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15b)

 

들릴라는 삼손을 거짓말쟁이로 몰아 세운다(10,13). 그러면서 이번에도 끈질기게 사랑한다면 힘의 비밀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들릴라는 이렇게 말 할 자격이 없는 여자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잡소리들은 구역질이 난다. 그녀의 수준은 제로점이고 신분은 사탄의 하수인이다. 회칠한 무덤이다. 한 인생을 -그는 거룩한 신분의 성도 삼손이다- 실패하게 만들기로 작정하고 덤벼드는 악질적인 요부(妖婦).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삼손 변주곡이 만난 최대의 실패변수.

그녀는 블레셋과의 밀약(5)을 삼손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무 죄의식 없이 삼손을 정죄한다. 이게 세상의 수준이다. 사회정의가 어떻고, 불의가 어떻고, 구조악이 어떻고, 변화와 개혁이 어떻고, 이러한 불행이 이번으로 끝나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명분의 외투를 입고 인간을 조작한다. 이런 사람은 들릴라일 경우가 많다. 들릴라적 꿈과 비밀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의 외침은 구호에 불과하다.

심각한 것은 신앙공동체다. 우리 안에도 들릴라처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물증은 없고 심증 뿐이지만, 혹 물증이 있다고 해도... 그래서 이런 소리를 계속하면 나 역시 들릴라가 되는 모순에 빠질지도 모른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빙자해서 결국은 자기 목적을 성취하고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는 것을 위해 교회가 허락하여 맡기고 위임한 힘을 그렇게 사용한다면 그는 들릴라다.

들릴라 졸개들 역시 하나님 두려워하는 신앙이 없으니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 들릴라처럼 사는 성도, 그는 누구인가? 야누스(Janus)요 카멜레온(Chameleon)이다. 두 얼굴의 가면을 벗어야 한다. 그것은 추한 몰골이다. 신앙공동체를 혼란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하고 악한 죄악이며,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다(2.15). 들릴라를 계속 놔두면 안 된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가 교회의 정책에 반영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결국은 그에 의해서 삼손이 무너진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들리라의 후예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곳은 -그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소망이 없다. 문제만 있다. “날마다”(16) 모여 서로 논의하고 회의를 해도 소용없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7a)

 

비슷한 상황이 창세기에 나온다. 창세기 39장에 보디발의 아내 역시 날마다”(10) 청한다. 그러나 요셉은 듣지 아니하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라며 그의 수준을 옹골차게 유지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계속되는 유혹에 이렇게 자신의 심중을 분명하게 고백한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b)

그런데 삼손은 제 발로 들릴라에게 걸어갔고(4), 형식적으로는 요셉처럼 자신의 신앙고백(17)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항복선언이었다. 하나님의 비밀을 누설하였기 때문이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7) 나실인이라고 고백을 말든지, 추한 꼴 보여 줄 것 다 보여주고 기껏 하는 말이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나는 가나안교회 중직자입니다. 나는 성도입니다.”라는 식으로 알량한 신분을 밝힌다. 그랬으면 거기에 걸맞게 살든지 했어야 했다. 신분과 수준의 부조화, 이것이 삼손의 치유 불가능한 골 깊은 영적 질병이다.

특별한 은혜와 은사를 주신 것은 이처럼 경거망동(輕擧妄動)하라고, 세상 앞에 나는 이렇게 살지만 성도야!”라며 뻔뻔스러운 자랑이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성도가 거룩을 잃으면, 하나님이 사명자로 부르셨지만 하나님 무시하고 막가는 식으로 살면, 이처럼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며 연명해 갈 수 있다.

삼손은 참 많은 기대와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남다르게 주목받았던 사람이다. 태어나 가나안 교회의 중직자가 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매우 영육(靈肉)간에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셨었다. 그는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처럼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서 만감(萬感)이 교차된다.

나 역시 이렇게 살 수 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지금도 아주 작은 부분에서,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영역에서 삼손처럼 악보를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뭘까? 누구나에게 삼손같은 아킬레스건(, the Achilles's tendon)이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20b)

 

이제 더 이상 삼손에게 하나님은 없다. 이로써 삼손 변주곡은 사실상 그 연주가 끝난 셈이다. 삼손 변주곡은 위대한 사사 삼손의 처참한 몰락으로 그 막을 내린다. 하나님은 이미삼손을 떠났으나 삼손은 아직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부재하시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 이 얼마나 위선이요 이중성인가? 하나님이 임재하셨을 때는 하나님 없이 살다가, 막상 하나님이 부재하시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처럼 행세하는 못난 삼손, 그게 성도라 자임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이러한 허세와 허풍과 허점과 허식이 언제부턴가 내 안에도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아 나의 모습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이 부끄럽다.

삼손은 하나님을 소멸해 버렸다. 여기서 잠깐 사도의 경고를 들어보자: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5.19) 그랬다. 삼손은 한 때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가나안에 내린 은혜의 소나기와 같은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17절은 결국 20절을 낳았다. 하나님이 떠난 삼손, ‘기묘자’(13.18)이신 예수님이 떠난 삼손, 성령님의 능력이 떠난 삼손, 그래서 인간 껍질만 남은 삼손의 후주(後奏, 21- )는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生地獄)이다.

   

 

부스러기 묵상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

그래도 삼손을 위로하고 싶은데,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싶은데, 회개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시 용기를 내어 좀 쉬다가 다시 가나안 교회에 출석은 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 자꾸 눈물만 난다.

그러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나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요 모양 요 꼴이 되겠지? 하나님이 참다 참다 하시다가 아니다 싶으시면 나 역시 버리시겠지? 더 이상 기대할 부분이 없다면 나도 퇴출되겠지? 교회는 삼손에게 권징이라는 치리권을 -권고사직, 수찬정지, 출교 등이 있다- 행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떠나시면 교회가 나를 품어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만이 희망인데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시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참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삼손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나 싶다. 자꾸 내 영혼의 아픔이 다시 도지는 것 같은 미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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