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삿 16.1-14).

20211202(묵상)

  

 

 

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

Jdgs. 16.1-14

 

    본문 관찰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밤새도록 밤새도록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7 아직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11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13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삼손 변주곡 제3악장

 

삼손 변주곡 제3악장은 같은 주제에 대해 지루할 정도의 변주(變奏)가 반복된다.

원인 제공은 역시 삼손 자신이지만 들릴라 풍의 작법(作法)이 제3악장의 흐름에 편입되면서 급기야 <삼손변주곡>은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사실 삼손 변주곡은 너무 난해하다. 곡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 뭔가 대단한 영감(靈感)이 있는 것 같은데 사사기의 다른 작품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편곡되었기 때문에 연주도 어렵고, 청중인 우리에게도 끈질긴 인내가 필요하다.

   

 

samson@judges.bible

  

3악장의 가장 큰 특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재(不在). 삼손은 마치 신약의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을 멀리멀리 떠난다. 물론 28절에 하나님이 등장하시지만 그것은 삼손의 독백이다. 이 역시 탕자(15.17-19)가 집 밖에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지난 날 아버지의 임재하셨음을 추억하고서 아버지를 찾는 장면과 오버랩(overlap)된다. 신약의 탕자는 현존하는 아버지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구약의 탕자 역시 현존하는 아버지 앞에 서고 싶어한다.

그랬다. 삼손은 탕자다. 아버지의 마음을 끝까지 아프게 한 못난 사람이었다. 세상은 참으로 집요하다. 비록 수준은 아니올시다였어도 신분은 사사였던 거목(巨木) 삼손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의 꼴은 말이 아니다. 세상은 적당한 선에서 후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 팽팽한 긴장이 제3악장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세 차례에 걸친 들릴라의 끊질긴 공격(7-9 → ② 10-12 → ③ 13-14)에 삼손은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한 테마의 통속적 반복의 변주곡(變奏曲) 같지만 이기느냐, 넘어지느냐의 기로에 선 무대를 바라보는 청중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손에 땀을 쥐는 시간이다. 하나님도 그러실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가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과연 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승부해 나가는가를 지켜보실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제3악장의 하나님의 침묵, 곧 하나님의 부재는 삼손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15.20)일 것이라는 생각, 해 보게 된다.

   

 

delilah@judges.bible

 

삼손의 성적(性的) 부도덕성은 들릴라에게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4). 그러나 그녀는 그를 수단으로 이용한다(5). 블레셋 다섯 방백은 삼손의 비밀을 캐내는 스파이 작전을 성공시킨다면 각각 은화 1,100개씩 그녀에게 주기로 약속한다. 이 밀약을 계기로 적과의 동침이 시작되었다. 삼손은 사랑으로, 그렇지만 들릴라는 은화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서로의 필요 조건을 만족시키고 싶어한다. 따라서 들릴라가 삼손 곁에, 그러니까 그녀가 가나안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가 아군(我軍)일거라 생각하는 것은 영적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이런 생각이 더 든다. 요즘 들릴라 식으로 기독교를 견학(접근)하려는 사람들(이단)이 많은 것 같다. 이들은 삼손의 영적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뭔가 초점이 다르다. 결국 자기 성취에 가깝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를 알고, 영원한 영생의 세계를 믿고, 성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거룩하게 살며 겸손히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말하자면 삼손의 세계를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이어야 되는데 그거 없이 기독교를 이용하여 장사하려 한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려 한다.

이처럼 많은 경우 자기 목적(목표)을 이루는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본다. 아간이 그랬고(여호수아 7), 블레셋과 들릴라가 그렇고, 사도행전의 시몬이 그러했다(8.18-24). 결국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과 신앙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 공동체 안에 삼손도 문제지만 들릴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문제다. 체험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고, 그래서 순수함을 잃게 되면 삼손을 붙들고 있는 영적 세계를 우습게 여기고 악질적인 언행(言行)을 일삼는 영적 망나니가 되어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가나안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 안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이들에게 멤버십(membership)을 줄지 모르나 -가나안에 사는 사람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움에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22.13)

   

 

http://www.samson-delilah.judges

 

가나안 안에는 들릴라도 있고, 블레셋도 있고, 삼손도 있고, 이스라엘도 있다. 들릴라가 삼손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 가나안 교회의 중직자라면 난 그런 하나님 믿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것은 지옥행 면책사유가 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들릴라(블레셋)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상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난 적당히 출석이나 하고 지내겠다며 주일 아침에 교회 출석부에 도장만 찍고 평생을 산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삼손(성도)이 바르게 살지 못하면 들릴라(세상)가 가나안에서 떵떵거리며 자기 마음대로 산다. 그녀는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삼손 역시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들릴라(세상)는 여전히 할 수만 있으면 삼손이라도 넘어뜨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탄은 때와 장소를,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수준은 아니지만 신분은 너무도 확실한 삼손도 만만하게 보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삼손의 가장 큰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10- ),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13- ), 세 번으로 안 되면 네 번(15- ),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사탄, 이단)은 들릴라 뒤에 숨어 그녀를 대표로 세워 놓고 막후에서 가나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일전을 불사한다.

사사가 통치하면 평화가 있었던 가나안의 전통마저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모습, 지금까지의 사사는 삼손처럼은 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삼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혼돈, 하지만 사사가 있으나 없으나 고통은 마찬가지라는 자괴감, 이스라엘(교회) 마당까지 들어와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며 승리했다고 아우성치는 건달들의 광란을 보라. 이게 가나안인가? 이게 사사인가? 이게 택한 받은 성도인가? 하나님이 세우신 가나안 교회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가나안에 산다는 게 부끄러운 것 아닌가? 세상 앞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스라엘이 나의 모습은 아닌가? 가나안이 안전지대가 아니면 그럼 어디가 쉴 만 한 물가인가? 성도는 어디에서 누구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무수한 질문들 앞에 힘없이 서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대한 아무 대답 없이 제3악장은 연주를 계속한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삼손 변주곡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듯 나의 이해와 긍정과 동의,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제3악장을 진행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삼손 변주곡이 끝날지 좀 더 지켜보아야겠다. 기대 반() 염려 반()으로!! 이렇게 지켜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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