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에피소드1(삿 14.1-20)

20211130(묵상)

  

 

 

삼손 에피소드(1)

Jdgs. 14.1-20

 

    본문 관찰

 

    딤나로 내려감(1-4): 내려가서 올라와서

       틈을 타서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딤나에서의 잔치(5-18)

       결혼식(5-10)

       수수께끼(11-18)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함(19-20): 내려가서 올라갔고

  

 

삼손 변주곡 제1악장

 

사사기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당혹스럽다.

13장과 14장이 얼마나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가? 그것만큼 지금 삼손은 오선지(五線紙)를 이탈하고 있다. 작품 No.13No.14의 이러한 이질적인 긴장은 앞으로 진행될 삼손 변주곡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기 한다. 이것은 사사기라는 무대나, 그 음악을 함께 호흡하는 객석 모두에게 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과연 삼손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카덴차(Cadenza, 13.25-14.6)

 

삼손은 지금 성령과 성령(13.25, 14.6) 사이에 독주자로 서 있다. 작곡(지휘)자 하나님이 삼손에게 주신 기회는 참으로 남달랐다. 그는 모태(母胎)에 조성되기도 전에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 13-‘서곡’)를 통해 역사의 무대에 예고된 사람이다. 그는 나실인 모태신앙(母胎信仰) 청년으로 자랐고 때가 차매”(4.4a) 여호와의 영이 그를 감동시키기 시작하셨다.

이제 블레셋의 40년이라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징조가 들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블레셋이라는 죄악의 열매가 완전히 익어 가나안이 온통 황무하게 되기 이전에 설익은 블레셋을 아웃 시키기 위해 삼손을 구원자(사사)로 기용하신다. 그러나 부모의 사사(師事)를 받아 이제 막 초연을 시작으로 홀로서기에 나선 삼손의 무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

 

(1) 충격스러운 것은 이 일이 여호와의 영이 임한 시기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충만 해도 추락할 수 있는가? 참 중요한 주제이다(이 주제는 삿11.29~33 참조). 나의 카덴차 역시 이럴 수 있다. 삼손을 향해 돌을 들기에는 뭔가 어색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살도록 특별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다.

 

(2) “내려가서 보고 올라와서 말하여”(1-2): 그는 거룩과 세속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와 세상을 천연덕스럽게 왕래한다. 그는 연속적으로 세속으로 내려간다(1,5,7,8,10,19). 이것은 끝없는 추락이다. 그것도 완전히 단조’(短調) 풍으로 자신의 인생을 연주해 버린다. 이스라엘이 기대한 가나안 교회의 찬란한 영광과 부흥이라는 찬양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사사도 있고, 교회도 있고, 성령님도 함께 하고 있는 풍경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라는데 큰 충격이 있다.

 

(3) “그녀를 나에게 데려다 주시오. 그녀는 내가 보기에 좋나이다.”(3): 그녀는 삼손의 보기에 좋았다(3,7). 그래서 그는 그녀를 좋아하였다.”(7, NIV) 삼손은 이방 결혼을 통해 불행한 사사기의 사이클(cycle)에 합류하고 만다. 그의 관심은 이미 영적인 것을 떠났다. 그는 지극히 육()적이었으며, 관심 역시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었다. 찬란하게 빛날 것처럼 보였던 그의 이름 태양은 떠오르자마자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지금 불행하게도 적과의 동침’(4, 15.10-13) 중이다.

 

(4) 이중성을 고발한다. 성령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안에 있을 수 있는 이중성, 이것은 삼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삼손을 통해 나를 보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이해하기에 난해한 사람이 삼손이다. 어쩌면 이 이중성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울과 야고보 사도의 고백을 다시 생각해 본다(7.21-25, 3.10-12).

   

 

빛바랜 카덴차(Cadenza, 8-10)

 

그는 스스로 나실인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는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다. 죄 속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일하는 모습을 본다. 거룩과 죄악을 적절하게 넘나들면서 되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기이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삼손이다. 그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모습이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 없다.

 

(1) 삼손은 아마도 이렇게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13.4,7,14)했지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사자가 살아 있을 때는 부정한 동물이 아니고, 갑자기 소리지르며 달려왔기 때문에 나의 행위는 정당방위(正當防衛)였다. 또한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걸어가며 먹고”(9a), 이처럼 했을 뿐이다. 죽은 사자가 부정한 것이지 꿀은 아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假裝)한 교묘함이자 사악함이다. 곧 지능적인 범죄다. 그래서 죄질이 더 악하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초신자가 아니어서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2) “고하지 아니하였더라.”(6b,9b): 그랬다. 그는 자신의 악함이 노출되면 부모로부터 요구되어 올 여러 정결의식(6.1-12)이 부담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는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자신의 육아일지’(13)를 듣게 되었고, 그 역시 나실인 수업을 착실하게 받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사기 기자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13장의 예고편과는 너무나 다른 작품이 14장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본문을 넘어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보자. 사사기가 하나의 문학으로써도 충분한 플롯(plot)을 갖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삼손은 부모에게도(6,9,16), 아니 하나님께도 자신의 잘못을 고하지 않았는데 들릴라(기생)에게는 나실인이라는 영적 비밀을 그만 고해 버린다(16.17). 그는 지금 수수깨끼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11-18). 급기야 삼손 변주곡 제3악장(16)은 하나님 없이 연주되는 세속 음악으로 타락한다(16.20).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고하는 삼손의 처절한 독백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16.28)- 애처롭게 이방의 블레셋 다곤 신진 무대에 울려 펴진다.

삼손 변주곡 제1악장(14, 14.4,6,19)은 물론, 2악장(15)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계셨다(14,19). 하나님은 삼손에게 고하신다. 아직 그의 연주는 끝나지 않았기에... 그것만큼이 삼손에게는 회복의 기회였다. 그런데 마지막 제3악장에서는 하나님은 결코 삼손에게 고하시지 않는다. 삼손 역시 심은대로 거두고 있는 셈이다. 있다면 그의 비참한 독백이 있을 뿐이다. 이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인생이 이처럼 추해진다면 , 이쯤 묵상하고 나니 정말 아찔하다.

 

(3) “삼손이 거기서 잔치’(술 마시는 잔치)를 배설하였으니”(10): 그는 완전히 이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과연 이 끝없는 추락은 어디까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거룩과 세속이 이제는 하나가 되어 버렸다. 성도가 타락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대목은 소위 두 번째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삼손 부분(14.6~19)에 들어있다. 성령 안에 있으면서 제5복음서인 내가복음으로 살아가는 삼손,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추측이 아니라 점점 사실이다고 긍정되고 있다.

   

 

수수께끼(11-18)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함(19-20)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b)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13.24)

    13.25 첫 번째_여호와의 신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5)

    14.6a 두 번째_여호와의 신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8)

       잔치(술 마시는 잔치)를 배설하였으니(10)

    14.19a 세 번째_여호와의 신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30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19b)

 

그의 수수께끼와 같이 삼손은 미로를 따라 다린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하지만 사사기는 약간의 힌트를 알려준다: “삼손이 틈을 타서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4) 하지만 모두에게는 이 일이 비밀이다. 한편 수수께끼 놀이는 4절의 성취인 셈이다. 또한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삼손에게 임하시”(19a)는 것을 통해 이 일은 삼손에게만 맡겨져 있거나, 삼손에게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인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이 일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부스러기 묵상 - 인생 오선지(五線紙) 앞에서

 

육아일기와 성장일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삼손처럼 나의 사역일기가 이처럼 파국으로 흘러가도록 그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인생은 후진기어가 없질 않은가. 또한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없지 않는가. 연습해 보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나의 카덴차(Cadenza)는 이렇게 연주되도록 방치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되어 가고 있다면 현재 내 인생이라는 무대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풍성하게 주어진 무대일지라도 여기서 일단연주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와 다시준비해야 한다. 실패할 게 뻔한 것 붙들고 추하게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는 죄송하고, 한편 황송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21.3)는 식으로 살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순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삼손 에피소드는 그 한 사람으로 족하다. 나까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부끄러운 예화에 올라타고 싶지는 않다. 어느 날보다 참으로 긴 시간을 내가 써가는 인생 오선지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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