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삿 12.1-15).

20211127(묵상)

  

 

 

에브라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Jdgs. 12.1-15

 

 

    본문 관찰

 

    논쟁(1-3): 입다 vs 에브라임

    전쟁(4-7): 길르앗 vs 에브라임

    소사사들(8-15): 입산, 엘론, 압돈

  

 

에브라임 소고(小考)

 

다시 동족 사이의 전쟁은 가나안을 피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에브라임은 다른 어떤 지파 보다도 광야교회’(7.38) 이후의 가나안 정복시대를 주도한다. 에브라임은 여호수아가 속했던 지파(2.8-9)로서 가나안을 통한 이스라엘의 부흥을 이끌었던 -사사시대 바로 이전 시기이다- 탁월한 지파였다. 그런데 사사기로 들어오면서 에브라임은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는 듯하다. 그 징후 가운데 하나는 에브라임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 내지 못하는 대목에서 우려가 사실로 확인된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1.29)

그러다가 8장에서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다. 에브라임은 이미 기드온에게 오늘 본문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8.1-3).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기드온과 크게 다투는지라.”(8.1b)처럼 뭔가 균형을 잃고 흥분한다. 그것은 사사시대에 자신들이 소외(무시)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몸으로 일은 하지 않고 입으로 시비만 거는 지파, 어제는 풍성한 데 오늘은 가난한 지파,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일에 격려(박수)는 못할망정 트집만 잡는 지파, 이것이 에브라임의 현재 모습이다. 하다 보니까 에브라임을 성토하는 인상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우리 역시 이렇게 될 수 있다. 과거의 것들의 이자 가지고 근근히 연명하며 살 수 있다. 에브라임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사역자로서 이런 유형의 성도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신앙은 아주 대단했는데 자식의 대()에서는 아니올시다!’인 분들을 볼 때 부모의 부스러기가 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연민을 느낄 때가 많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며 백수건달(白手乾達)로 휘청거릴 때가 아니다. 이럴 땔수록 첫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부흥 앞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 자신들도 가나안의 건강을 위해 뭔가 헌신해야겠다는 새로운 결심, 이것이 에브라임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런데 이것은 내분’(內紛)이다. ()은 가나안의 아직 남은 족속들이지 동족(同族) 지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과 광야를 거처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가나안을 주신 것은 지파들(성도들) 끼리 싸우고, 시기하고, 서로 깎아 내리고, 발목 잡으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고 살아도 부족한 판에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스스로 버리는 불신앙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떠나면 그 영혼은 이처럼 바싹 말라 생명 없는 몰골로 점점 몰락해 가고 만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

 

그리고 오늘 본문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죄의 파편들을 보라. 에브라임은 이번에는 입다의 승리를 놓고 또 시비를 건다. 알은 낳지 못하면서 소리만 지르는 닭처럼 우매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그 닭(에브라임)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교회 안에 느닷없이 터져나온 소리는 참으로 가관이다. 앞서 기드온 때의 부정적인 여론 조성보다도 한 술 더 뜬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1)

승리한 지상교회의 한 예표라 할 수 있는 가나안 교회에도 우리 시대의 교회꾼들처럼 함부로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우습게 여기는 무리들이 있었다.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우리 시대 신앙공동체 안에도 꼭 에브라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예 이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사역의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사사건건(事事件件) 깐죽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초신자는 그럴 줄 모른다. 마치 지난 날 한 때 에브라임처럼 복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에 이처럼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은 회개할 줄 모르고, 교만과 방자함으로 터줏대감 노릇이나 하려고 거들먹거리는 에브라임에게 마침내 개입해 들어오셨다. 그것은 무엇인가? ‘심판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있으면서 애굽처럼 살고 있는 에브라임, 한 때 하나님의 영광과 가나안의 부흥을 위해 복된 헌신을 했던 과거를 모르실리 없으신 하나님이 마침내 에브라임의 못된 버릇을 고치시기 위해 공의(公義)의 하나님으로 에브라임 앞에 서셨다. 이게 이스라엘 지파들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동서전쟁(東西戰爭)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42,000명이었더라.”(6b)

 

참 비극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동족상잔(同族相殘)이 가나안에서 벌어진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에브라임의 몰락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입다를 통해서 권징을 시행하심으로서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보존과 회복을 시행하신다. 사실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전에 에브라임은 가나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타락과 심판, 회개와 회복의 사이클(cycle)에서 가나안의 가나안됨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오히려 훼방이나 하고 있을 때 -가나안 족속들이 이랬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았기에, 그것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에 합력했어야 했다.

입다는 기드온과 달랐다. 기드온은 화합을 우선하여 무리하지 않는 사역 리더쉽(8,1-3)을 발휘했지만 입다는 공동체의 거룩성을 지키며 가나안이 세속화되는 것을 권징(치리)을 통해 막아내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가뜩이나 아직 멸하지 못한 가나안의 토착세력들과, 그들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이스라엘 성도들 때문에 가나안 교회가 표류하고 있는데,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지는 않고 에브라임이 가나안 족속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한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다. 이것이 내부의 거룩을 위해 42,000명이나 치리(권징, 심판)를 시행하시면서까지 치루어야 했던 값비싼 대가였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약속의 땅 가나안, 당신의 말씀과 섭리가 시행되어 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 역시 해 본다.

우리 역시 에브라임적 요소가 공동체 전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에브라임을 희생해서라도 가나안의 거룩을 지켜나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피할 수 없다. 나 역시 할 수 만 있다면 입다의 배역은 피하고 싶지만 그러나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면, 그것이 사역자로서 감당해야 할 영적 부담이라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다. 험난한 사사시대를 살아가는 고통, 이것이 본문의 입다에게서 느끼는 부스러기들이다.

이렇듯 점차 가나안은 황무하기 시작한다. 사사들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회의적이다. 이스라엘의 배도(背道) 역시 그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사사가 6년을 다스려도 평화는 없고 전쟁과 죽음과 다툼과 고난이 있을 뿐이다(7). 또한 세 명의 사사(입산, 엘론, 압돈; 8-15)의 이야기가 중간광고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사사라는 이름은 오직 부와 권력과 왕을 행세하는 이미지 뿐이다. 이제 사사기의 사이클마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변주되고 있다.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다.

 

   

제목 날짜
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07
총회일기.總會日記(삿 20.1-11) 2021.12.07
폭행일기.暴行日記(삿 19.16-30) 2021.12.06
애첩일기.愛妾日記(삿 19.1-15) 2021.12.06
미가와 단 지파의 인생이력서(삿 18.21-31) 2021.12.02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1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1.29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1.29
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삿 17.1-6). 2021.11.29
삼손은 죽어서 말한다(삿 16.23-31). 2021.11.29
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삿 16.15-22) 2021.11.29
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삿 16.1-14). 2021.11.29
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삿 15.14-20). 2021.11.29
블레셋 바이러스(삿 15.1-13) 2021.11.29
삼손 에피소드1(삿 14.1-20) 2021.11.24
삼손이 오고 있다(삿 13.15-25). 2021.11.23
잠자는 40년을 깨운다(삿 13.1-14). 2021.11.22
에브라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삿 12.1-15). 2021.11.22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까?(삿 11.29-40) 2021.11.22
입다에게서 듣는다(삿 11.12-28).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