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까?(삿 11.29-40)

20211126(묵상)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까?

Jdgs. 11.29-40

 

    본문 관찰

 

    입다의 서원과 승리(29-33)

    서원, 그 비극적 이야기(34-40)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니

 

오늘은 사도행전에서 약간의 도움을 받으며 묵상을 시작한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두 통로가 소개된다. 하나는 기도할 때다(2.1- ). 잘 아는 대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셨다. 다른 하나는 말씀이 증거될 때다(10.44- ).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가 입을 열어 설교(10.34-43)를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 성령님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역사하신다.

   

 

헛된 서원(29-33)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29a)

 

사사기 기자 역시 성령님께 민감하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입다는 위의 두 채널과 모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사사기 11장에서 먼저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쓰시겠다는 정황을 놓고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11b)처럼 기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암몬을 청중으로 놓고 설교’(14-28)를 하였다. 이처럼 말씀이 증거되는 이 때에 성령이 입다에게 임하셨다. 그 역시 기드온처럼 큰 용사’(6.12, 11.1)로 부름을 받아 성령이 임함(6.34, 11.29)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사사 소명의 패턴을 이어간다.

성령님은 이처럼 말씀과 기도가운데 임하신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기까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새롭게 묵상한다. 생각해 보면, 실로 오랜 시간 동안 주님은 나를 만져주셨다. 고등부 1학년 여름방학 때 주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다. 3대째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한 나는 그때까지 배웠던 모든 성경 말씀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나는 나 같은 자도 복음을 위해 필요하시다면 쓰시옵소서!”라며 목회자로 부르시는 주님께 기도하며 서원하였다. 이처럼 은혜를 받고 보니 그냥 기뻤다. 기도가 좋았고, 말씀이 좋았고, 주님이 좋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동안 QT를 하면서 이 찬송이 나의 간증이 된 것을 감히 고백하게 된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결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처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 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잠잠하게 되도다.”

      (찬송가 1821)

 

그럼에도 이 순간 여전히 성령님을 사모한다. 다시금 새롭게 임하사 정결한 영을 새롭게 하시기를 가슴 깊이 간구한다. 실수와 실패, 좌절과 눈물, 고통과 고난, 동시에 기쁨과 감사, 은혜와 평강, 비전과 충만이 공존(共存)하는 의인된 죄인인 나를 이제는 조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넘어졌으나 다다른 그곳이 다시 주의 품이었기에, 언제나 묵묵히 나를 받아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오래오래 참아 주시는 분, 언제나 침묵으로 말씀하시며 내 길의 등불이 되어 주셨던 그분, 그래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에 행복해 하는 내가 되었다.

주님 기대에 언제나 함량미달인 나를 보면서 가슴 아파 부르짖다가 눈물로 범벅된 손수건이 모자라 양말을 벗어 닦아도 여전히 텅 빈 내 심령을 하나님께 들킨 것 같아 서러워서 울고, 그러다가 은혜의 옷자락 실 한 오락에라도 붙잡고 싶어 발버둥치던 기억들이 성령님에 대한 묵상을 더듬는 이 시간에 촘촘하게 되살아난다.

이 아침 입다의 바로 이에가 나에게도 다시 은혜로 임하기를 소망한다.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것만으로 살 수 없기에 -성령님은 가까이 알아갈수록 더 갈급한 분이시다- 계속해서 부어지는 바 되시는 그분의 임재하심을 더 간절히, 더욱 진심으로, 더더욱 겸손함으로 나를 드리기 위해 그분 앞에 선다. 어느 날보다 행복하고 따뜻한 말씀이다. 사랑합니다, 성령님!

하지만 그런 그가, 그러니까 여호와의 영이 임하신 바로 그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과 협상(거래)을 벌이는 헛된 서원을 하다니... 다시금 사사기는 미궁으로 치닫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가장 거룩하고 진실해야 할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 성령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악들과 사리사욕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사사기적 성령이라는 혼돈의 때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입다의 비극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다.

   

 

아버지 vs (34-40)

 

입다는 전쟁에서는 승리하지만 그러나 서원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외동딸을 잃는다. 희극이 비극이 되는 순간이다. 서원이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서원을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옳거나 바른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가증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12.31)

 

따라서 서원했으니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서원에 순종한다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죄가 양산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되는 사사기적 죄악일 뿐이다. 서원은 입다가 했는데 죽는 것은 딸이다. 이게 사사기다. 내가 사사기의 입다처럼 살아갈 때,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죽어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끝없는 혼돈이 사사기다.

   

 

부스러기 묵상

 

성령충만 해도 실패하는가?

버거운 주제다. 소위 입다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번제 서원”(30-31)은 입다에게서 가장 어렵게 다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볼 때에도 그리 쉽게 말 할 수 있는 주제는 결코 아니다. 먼저 전제할 것은 입다를 변호하거나, 혹은 성령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성령을 비하(卑下)하거나, 입다의 경험이 별 것 아니라거나, 번제 서원을 다르게 미화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성령충만 해도 실패하는가? 성경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입다가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입다의 실수는 성령충만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다. 성령님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 봐라. 성령 받았어도 별 수 없지 않느냐.”며 말하지만 성령 받으면 만능(almighty)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성령 받아도 자기 의지가 살아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그는 성령이 임하시는 놀라운 경험이 가져다 준 은혜를 절제(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은혜가 자신을 주장하도록 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가져다 준 결과에게 자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은혜의 주도권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성령충만은 만능열쇄가 아니다. 모든 실수와 실패라는 오류를 자동적으로 막아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성령충만하면 그때부터는 전혀 실패와 실수 없이 산다고 하는 생각을 성경이 지지하는가? 이것은 경험(임상)적으로 볼 때도 동의할 수 없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성령 받았어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언제나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님 역시 인격이시다. 인격은 기계가 아니다. 마음대로 조작하고, 조정하고, 조립하지 않는 것이 인격의 특징이다. 실수는 입다가 했는데 지탄은 성령님이 받는다면 그것은 바른 접근이 아니다. 우리가 입다의 딜레마에서 느끼는 것은 성령충만 해도 실패하는가에 대한 당혹스러움이다. “성령충만 해도 실패하니까 성령도 별 수 없네!”가 아니라 성령충만 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깊은 고독, 성령충만 해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긴장, 오늘의 성령충만이 내일의 삶의 건강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님의 지배권에서 이탈하지 않는, 그러한 교만하지 않음 안에서의 은혜의 수납이 우리가 더 싸워야 할 부분이라는 점을 통찰하는 것이 더 우선한다.

성령충만 해도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 교회아닌가 싶다.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해 버리는 것이 성령의 인격성이라는 선로(線路)에서 이탈하는, 그래서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에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가장 큰 적이라는 역설을 깨닫는 것, 그것이 오히려 입다의 딜레마에서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고, 또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입다의 실수를 뭐 대단한 것인냥 부풀리는 충동을 이겨낼 수 있다. 입다 역시 평범한 한 인간이다. 그 역시 비록 성령님이 임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님을 씁쓸하지만 인정하자.

나는 실수할 수 있고, 입다는 곤란하다는 식은 어딘지 모르게 좀 어색하다. 만약 아직도 입다의 실수를 보면서 입에 거품을 품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그것만큼 성령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입다를 묵상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할 사람이다. 성령님을 내가 아는 상식이나 단편적인 지식으로 퍼즐(puzzle)하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그럼 어떻게 할까? 성령님이 임하시는 두 가지 통로를 기억하면 된다. 다시 성령님을 묵상하면서 더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 앞에서만 서면 초라해지는 나, 그러기에 더욱 의지하고 따르고 섬길 수 밖에 없다. 입다처럼 실수하는 일이 있다 해도 할 수 만 있다면 난 성령님이 임하시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고 싶다. 성령이여, 오늘도 부족한 종을 만져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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