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에게서 듣는다(삿 11.12-28).

20211125(묵상)

  

 

 

입다에게서 듣는다.

Jdgs. 11.12-28

 

    본문 분석

 

    암몬의 요구(12-13): 길르앗이 속한 요단 동편을 반환하라.

    입다의 설교(14-27): 예초부터 암몬의 땅이었던 적이 없었다.

    암몬의 반응(28): 입다가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다.

  

 

암몬이여 들으라!

 

다른 여타 가나안 족속들은 사람 막대기라는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다.

마침 암몬에게도 이 기회는 온 셈이다. 그런데 전제할 것은 만약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있을 때였다면 이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잠시 쓰인 도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10.10-18), 거기에 준비된 사역자 입다까지 있으니 싸움의 승패보다도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실까에 -지금까지의 사사기 패턴과는 좀 다르다-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사실 세상은 똑똑해 보여도 결정적일 때는 무식하다. 지금은 굴복할 때이지 대항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 죽기 위해 싸우겠다는 무식한 비장함 밖에는 없다. 이게 세상이다. 큰소리만 치다가 결국은 패망하고 항복한다(33). 실력 없이 소리만 지르는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함을 여기서도 깨닫는다.

또 하나는, 세상은 결코 교회의 선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14,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어도 저들은 그 말씀 앞에 순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갈 길을 간다. 그 끝이 죽음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얼마나 무모하며 불쌍하기 짝이 없는 행위인가. 이것이 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섭리 법칙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실패 방정식이다.

   

 

입다의 설교

 

암몬의 시비와 거기에 대한 입다의 반응인데 분쟁의 발단은 이렇다. 아르논에서 요단까지의 땅을 -이 땅은 과거 모압 땅이었다- 암몬이 내 땅이라며 돌려달라고 요구한다(13). 이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입다는 다음 몇 가지로 선포한다. 먼저, 지금 암몬이 요구한 땅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모압의 땅이 아니라 아모리의 땅이었다(22-23). 둘째로, 이 땅은 하나님이 얻게 하셨다(24). 셋째로, 당시 모압왕 발락도 이스라엘이 아모리에게서 취한 땅을 놓고 전쟁을 벌인 일이 없었다(25). 설령 암몬 땅이라 하더라도 300년이나 잠잠했는데 이제와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무슨 심보냐(26). 그러니 얼토당토 않는 억지라는 것이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한편 입다에게서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세상 앞에 명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그의 실력(통찰)이다. 그는 대답을 연구하지 않았다. 자문(諮問)을 받기 위해 머리를 빌려 쓰지도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로 소리만 지르지 않는다. 그는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적 건강에는 별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1-11). 하나님이 주목하신 이유, 분명 있는 사람이다.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걸린 것 하나는, 세상을 향해서는 벙어리이면서 교회 안에서는 나팔수를 자임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인생인가를 스스로 폭로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우선 입다의 방대한 지식에 압도 당한다. 과거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입다가 아닌가. 단순히 언변(구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에는 능한데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고, 능력은 있는데 말에는 형편없어 늘 말로 자신의 점수를 까먹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입다는 지금 언행(言行)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으로 이미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입다를 주목하시는 이유는 이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하나님이 이처럼 쓰시기 이전에 이미자신을 준비한 사람이다. 마치 요셉의 환경이 그를 흔들지 못했던 그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처럼, 다윗이 목동으로 있을 때 실력을 갖춘 것처럼,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기 이전에, 또한 얼마동안 홀로서기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을 때부터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오늘까지 건강한 성도로 속사람을 단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 기대해도 될 사람으로 서 있다.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21a)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23a)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24b)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27b)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고 있으며(과거), 그래서 지금 당면한 문제 역시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갔고(현재), 하나님이 반드시 섭리하실 것을 믿었다(미래). 우리가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일상의 영성에 뛰어난 사람, 바로 그가 입다!, 곧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다.

   

 

설교 그 이후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암몬이 입다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못했으니(28) 그의 설교는 실패인가? 오늘 주제와 상관없는 사족(蛇足) 같지만 사역자 입장에서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기에 좀 더 생각해 본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고, 곧바로 스데반의 설교를 생각해 보자(사도행전 7). 성령충만한 설교자였고, 뛰어난 강해설교였는데 결과는 그의 청중들을 설득(변화, 감동)시키지 못하였고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그럼 스데반 역시 실패한 설교요 설교자인가? 이것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다. 설교의 기준을 사람들이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설교가 변질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설교는 청중의 반응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 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것이 있는가, 그리고 바로 그 말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설교다. 비로소 이 때에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설교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설교 평론가는 될지 몰라도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과는 이질적인가를 모르는 희한한 사람들로 전락하고야 마는 것이다.

비록 암몬과 같은 청중들을 만날지라도 입다처럼 설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스데반의 청중같은 사람들이 나의 설교를 듣는다 할지라도 스데반처럼 설교하는 사람으로 죽음의 길을 가는 설교자로 쓰임 받는 것을 거역할 수 없다. 문제는 입다처럼 바른 신앙, 바른 신학, 바른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가에 있다. 입다의 설교를 들으면서 가난한 내 영혼을 본다. 아직 멀어만 보이는 설교자로의 부르심을 언제나 하나님의 긍정(肯定)으로 응답해 드릴 수 있을지 또 하나의 숙제를 가슴으로 품어본다.

 

  
제목 날짜
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07
총회일기.總會日記(삿 20.1-11) 2021.12.07
폭행일기.暴行日記(삿 19.16-30) 2021.12.06
애첩일기.愛妾日記(삿 19.1-15) 2021.12.06
미가와 단 지파의 인생이력서(삿 18.21-31) 2021.12.02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1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1.29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1.29
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삿 17.1-6). 2021.11.29
삼손은 죽어서 말한다(삿 16.23-31). 2021.11.29
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삿 16.15-22) 2021.11.29
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삿 16.1-14). 2021.11.29
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삿 15.14-20). 2021.11.29
블레셋 바이러스(삿 15.1-13) 2021.11.29
삼손 에피소드1(삿 14.1-20) 2021.11.24
삼손이 오고 있다(삿 13.15-25). 2021.11.23
잠자는 40년을 깨운다(삿 13.1-14). 2021.11.22
에브라임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삿 12.1-15). 2021.11.22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습니까?(삿 11.29-40) 2021.11.22
입다에게서 듣는다(삿 11.12-28).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