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광야복음: 믿음에 심겨 여리고에서 꽃피다(수 2.1-24).

20210117(양무리교회)-강해02

 

 

 

광야복음: 믿음에 심겨 여리고에서 꽃피다.

Josh. 2.1-24

  

    본문 관찰

 

    여호수아의 명령(1)

    정탐꾼 이야기(2-22)

    정탐꾼 보고서(23-24)

 

        ▪광야 - 굳게 닫혔다 - 가나안 사람들

        ▪광야 - 복음 .. 믿음 - 기생 라합

   

 

라합과 두 명의 정탐꾼: 또 하나의 정탐이야기

 

또 하나의 정탐이야기가 새롭게 등장한다.

지난 38년 전 가데스 광야에서 12 정탐꾼의 [1차 가나안 보고서](13.25-33)와는 반대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직 요단강 동편에 진을 치고 있으며, 이때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가만히”(1) 보내어 요단강 서편 어귀의 땅, 특히 여리고 주변을 살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차 가나안 보고서]에 의하면 가나안 땅 거주자들이 이스라엘에 역사하신 하나님 때문에 심히 놀랐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기생 라합이 있다. 이처럼 가나안(라합)에서 믿음의 고백(간증)이 입으로 시인되기까지는 40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2차 가나안 보고서: 기생 라합 이야기

 

    “내가 아노라 우리가 들었음이라 ”(9-10)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11)

    ▪광야 - 복음 .. 믿음 - 기생 라합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정탐꾼들을 보낸다(1). 그 옛날 싯딤에서 미디안 여인들 때문에 이스라엘은 크나큰 위기를 맞았으나(25.1-18) 이번에는 기생 라합이라는 가나안에 사는 여리고 여인에 의해 좀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가나안은 진멸의 대상이지만 라합처럼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2장이 가지는 절묘함이다.

그녀의 신앙고백(9-11, 4.39 참조)과 정탐꾼들과의 언약(12-14)은 매우 놀랍다. 이 믿음의 기원은 어디인가. 당시는 광야교회’(7.38) 시대였고, 가나안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 요단강 건너 8떨어진 여리고에 사는 그녀가 어떻게 이러한 복음을 알고 있었을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10b, 10.17). 이것이 여리고 백성과 라합이 근본적으로 나누어지는 지점이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대단한 도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라합과 정탐꾼들과의 언약(12-14)이 둘 사이의 “‘선대(헤세드)하였은즉 선대(헤세드)하여로 맺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헤세드(자비)를 함께 얻고 누리기 위해서서는 계속적인 정탐꾼과 언약을 맺은 때부터 여리고 정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언약의 신뢰와 준수가 필요하다(15-21). 이것이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기자가 라합을 관찰한 부분이다(11.31, 2.25).

그녀는 생활이 정숙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도 살몬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를 낳는다. 이로써 다윗의 조상으로 예수님의 구속사의 족보에 올랐다(4.21, 1.5). 사실 구원하심이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임은 신구약 모든 성경과 역사의 핵심이다는 점도 라합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부스러기다(1.12-13, 참조/ 다말 - 가나안, 38.6).

 

2 정탐꾼들의 계획은 전부 틀어진다. 이들은 다 노출되었다. 이젠 정탐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가 꿈틀거리는 순간이다.

 

8 삼대에 숨겼더라(6). 파피루스에서 섬유가 될 것들을 추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미 보리 추수가 끝난 시기다. 전쟁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9절 이하 왜 라합이 앞서 그런 언행을 했는지가 밝혀진다.

내가 알았다(9). 과거 어느 때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주셨다(9) 이미 주셨다. 이방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외쳐진다. 이는 이미 40년 전 여호수아와 갈렙이 한 고백 아닌가. 그럼에도 그때에는 10명의 정탐꾼에게는 이 확신과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방인의 입에서 40년 후에 이 고백이 터져 나온다. 놀랍다.

두려워하다(9) -

녹았다(10) = 낙담하다(15.15)

하나님이 전쟁에 사용하시는 무기요 방식이다. 이 고백이 라합에게서? 놀랍지 않은가.

 

9-11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하고 고백해야 할 것들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근거요 토대다. 그런데 가나안이 이를 알고, 듣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인가? 이방에도 복음은 전파되고, 그렇다면 저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결국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 아니며, 죽임과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다. 비록 이방의 백성들일지라도 저들이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마음이 있다면 저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구속은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다.

이미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미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라합의 입술에서 신명기의 고백이 터져 나온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르(Ur)를 떠나듯, 라합 역시 여리고를 떠난다.

 

선대(12-13) = 자비(헤세드) - 여호수아에 처음 나오는데 이게 라합에게도 나온다. 실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요구다(7.1-5). 그런데 정탐꾼들은 이 요구를 받는다(14).

 

18-19 붉은 줄(18): 어린 양의 피

유월절 분위기. 후에 여리고 무너질 때 라합의 집만 그대로 남는다.

라합은 가나안과 가나안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간다.

히브리서 11장 라합

야고보서 아브라함과 비교하는 인물로 라합이 나온다. 아브라함 급이다.

   

 

가나안 사람들

 

    ▪광야 - 굳게 닫혔다(6.1) - 가나안 사람들

 

이들은 함의 후예들로써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며, 사악하였다. 그리고 라합이 들었던 하나님의 소식을 진정으로 듣지 못했다(9-11).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그냥 죽이는 것, 그러니까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미 400년 전에 하신 말씀에 의하면 그만큼 심판을 미루신 것에서도 그렇다. 결국 여리고 정탐과 정복, 또한 기브온 백성들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이 가나안 백성들 역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알게 한다.

   

 

부스러기 묵상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11.31)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5)

 

흉년과 불치병에도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36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사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4.25-27)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와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흉년이 풍년이 되고, 나병이 치유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가 없어서 그랬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믿음의 눈을 들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아서다.

그럼 이 이야기를 여리고로 가져가 보자. 기생 라합이 여리고에 살 때 어찌 혼자였을까. 수 천, 수 만의 가나안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 또한 어찌 라합이 간증하듯 토해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녀만 들었겠는가.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 4장 스타일로 기술해 보자: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가나안 땅 여리고성 안에 많은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라합과 그의 가족들 뿐이었느니라.’

다시 그럼 이를 지금 우리 시대에, COVID-19 시대에 넣어보자: ‘COVID-19 때에 부산광역시 350만 시민들 가운데 50만이라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양무리교회 사람 OOO 뿐이었느니라.’

어떠신가요. 정신이 번쩍 나지 않으시나요. 노아시대에도 그들이 믿던 믿지 않던 그것과 상관없이 약속(언약)의 방주는 지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의 회상처럼 방주에 들어가는 그 때까지도 방주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어졌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8-39)

지금 우리 시대 역시 동일하다. 교회가 어쩌구저쩌구, 교회 다니는 사람을 향해 이러쿵저러쿵, 성경과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 받아 마땅한 저주를 그 값이 어떨 것인지도 모른 채 입에 올리는 시대에도 사렙다 과부처럼, 나아만 장군처럼, 기생 라합처럼, 노아의 일곱 식구들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축복 안으로 걷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최후 승자가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귀가 있는 자는 다 듣고 있고, 눈이 있는 자는 다 보고 있고, 생각이 있는 자는 다 생각하고, 입이 있는 자는 다 말한다. 그리고 느끼고, 깨닫고, 돌이키고, 회개하고, 감격하고, 맡기고, 돌아서고, 무릎 꿇고, 통곡하고, 동시에 그러면 안 보려고, 안 들으려고, 그런 악한 무리에 안 끼려고, 그래서 기생 라합처럼 살려고, 나아만처럼 치유되고 살아나는 쪽에 서려고 발버퉁치며 이 험한 세상을 이기려고 몸부림친다:

 

    [이 풍진 세상을](1910년 기독교 신자 '임학천'희망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잃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또 다시 꿈 같도다 또 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여리고행전

        ▪광야 - 굳게 닫혔다 - 가나안 사람들

        ▪광야 - 복음 .. 믿음 - 기생 라합

 

광야의 이스라엘이 복음과 하나님으로 살아야 그 소식이 가나안 여리고에 전해진다. 복음은 광야라는 박스(Box)에만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 여리고 한 복판에 살아도 라합처럼 믿음의 눈을 뜨면 복음이 보이고 들린다. 그렇다면 여리고라는 세속도시가 아무리 하나님 거리두기, 이스라엘 거리두기, 광야교회 거리두기, 광야복음 거리두기를 통해 교회와 복음과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거리두기를 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가나안 여리고에서도 복음은 들을 수 있고, 여리고에서도 믿음은 꽃피울 수 있고, 여리고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눈을 뜨고 복음의 꽃을 피우는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여리고처럼 광야복음을 향해 굳게 닫고 있어도 광야가 하나님으로 가득 넘치게 될 때 이 광야복음은 여리고(세상, Pandemic/팬데믹, Covid-19/코로나)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으로 초대하신다. 여리고라는 세상에도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하나님 거리두기라는 세상에도 복음은 여전히 능력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세상 한 복판을 살아낼 때 세상의 한 복판인 가나안 여리고에도 부흥은 일어난다.

 

라합처럼 믿음으로 사는 자를 통해 여리고가 할 수 있는 모든 언행이 핑계요 변명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둘이다. 하나는 광야이고, 또 하나는 여리고다. 광야에서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중심인 여리고에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사는 곳이 세속도시인 여리고와 다를 바 없다. 그럴지라도 라합처럼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이 COVID-19라는 세계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복음이다. 같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울화통 터져가며 싸우는 것으로 소비하며 살 수 없다. 가나안과 여리고와 방불한 세상 속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고, 라합처럼 코로나와 같은 세상에 구원의 빛과 꽃을 피워내야 한다. 여리고일지라도 다 가나안 백성들처럼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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