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8-19(묵상)
요시야[3]: 유월절을 지키다.
2 Chr. 35.1-27
본문 관찰
④ 26세(즉위 18년, 34.8-35.19)
D. 유월절(1-19) - 사무엘 이후에 최고(최상)로 드려짐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18년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35.19)
⑤ 39세(즉위 31년): 무깃도대첩에서 전사(20-27) - 예레미야(25)
*예루살렘을 떠난 요시야(20)
*애굽왕 느고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21)
39세(8+31)까지 달리다.
요시야의 전성기는 그의 나이 26세 때다(34.8-35.19).
8세에 왕이 되었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더니(16세), 급기야 종교개혁을 단행한다(20-26세). 이를 시작으로 26세부터 율법과 예배를 회복하며 유다를 다윗언약의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이렇게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이어지는 그 이후 13년(39세)을, 곧 그의 왕위 31년까지 다윗의 길로 달려간다.
26세(즉위 18년) - 유월절을 지키다(1-19).
▪“요시야가 왕위에 있는 자 18년 해에 …”(34.8)
∙성전 수리(34.8-13)
∙율법책 발견(34.14-28)
∙언약 갱신(34.29-33)
∙유월절(35.1-19)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18년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35.19)
율법대로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킨다(1). 유월절을 지킨 것은 히스기야 이후 반세기도 더 지난 때이다. 그 사이 유다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서서히 잃어갔다. 따라서 요시야의 유월절 회복은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기쁨이 다시 부흥되어야 한다는 소망까지 담겨있다.
요시야가 제안하는 유월절 매뉴얼(2-6,10-16)에는 그야말로 제사장적 통찰이 묻어날 정도다. 제사장들 → 레위 사람들 → 족속대로 직분에 따른 직무를 수행하게 하는데 이는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6b) 행할 뿐만 아니라 다윗(다윗언약, 삼하 7장)과 솔로몬(성전언약, 대하 7장)이 명한 규례를 ‘준행하여’ 준비하고 또한 성결하게 행할 것을 명한다(2-6).
이제 요시야의 명령을 따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규례대로’ 백성들에게 화목제물을 나누고,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까지 모두가 다 예배자의 자리를 지킨다(10-17). 이 모든 것이 요시야의 모범(본)으로부터 시작되어 리더십에 있는 자들까지 다같이 자신의 소유를 ‘즐거이’ 이웃(백성)들과 나누는 섬김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이 든든하다(7-9).
39세(즉위 31년) - 무깃도대첩에서 전사하다(20-27).
8세에 왕이 되어 그의 왕위 31년을 다윗의 길을 따라 달려왔다. 그런데 요시야의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할 때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다름 아닌 애굽이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전쟁이다(20). 이때 요시야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전쟁에 출정하고, 오히려 애굽 왕 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시야에게 전한다: “…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21) 참 묘한 반전이다.
그러나 요시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22a) 므깃도 골짜기에서 싸우다가 전사한다(22b-23). 이 일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해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 큰 슬픔이었다(24-25). 31년 마무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결과라는 게 좀 아쉽지만 그러나 요시야는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26) 다윗의 길을 따라 행한 선한 왕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점차 멸망기로 넘어가는 유다, 이제 유다는 어찌될 것인가.
부스러기 묵상
전쟁에 참여하는 게 틀린 것일까.
왕은 마땅히 나라와 백성들을 위기(위험, 전쟁)로부터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 무엇이 요시야에게 문제가 되었을까. 그것은 애굽과의 갈그미스대첩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그 어떤 흔적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결과론적인 이유이기보다는 전쟁의 승패라는 결과 이전에 마땅히 유다 왕이 물었어야 할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이자 태도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처럼 요시야는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을 생략(무시)하고, 곧 바로 자신이 이 모든 일을 맡아 버렸다.
여기서 애굽 왕 느고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 그런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21a) 자, 이 느고의 말의 진위를 떠나 무엇보다도 이방 나라의 왕의 입에서도 하나님이 논해지고 있다면 유다의 왕이 하나님을 말하고 찾고 구하여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더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물론 이방 왕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고 거짓되이 말하는 경우(32.9-15; 왕하18.25 참조)가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기 때문에 요시야가 이를 쉽게 간과했을 것도 예상되는 일이다.
하지만 진위라는 사실 관계와 상관없이 평생을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요시야이기에 당연 이 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였어야 옳다. 인생은 누구든,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구하는 게 맞다.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요시야는 더 그래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천하의 요시야도 인생 마지막에 휘청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익숙하지는 않다. 다 잘하고 한 번 잘못해도 다 잘한 것 때문에 그 한번 잘못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용서되는 일은 없다. 하나님은 늘 그러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