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일기.沈黙日記(삿 21.13-25)

20211214a(묵상)

  

 

 

침묵일기(沈黙日記)

Jdgs. 21.13-25

 

    본문 관찰

 

    뉘우침(13-15)

    비정상적인 해결책(16-24)

    결론(25)

  

 

두 지평

 

본문에는 온통 권모술수(權謀術數)에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답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여전히 하나님은 부재(不在) 중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공동체(교회)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이처럼 대접해 드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사사기만큼 이 역설을 보여주는 성경이 또 있을까. 결국 사사기는 끝까지 이러한 불신앙으로 분광(分光)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53.6a) 이들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다. 그토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으면서도 말이다.

   

 

베냐민

 

성공(20.19-22) 성공(20.24-25) 실패(20.29-48)의 사이클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것으로 베냐민의 일기가 끝났어도 할 말이 없다. 이처럼 사사기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행하며 살았다.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을 갈급해 하지도,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지만 베냐민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실패 이후의 베냐민을 보라(20.47, 21.13- ). 수 만 명이던 지파가 겨우 600명만 남고 다 엎드려졌으니 이들의 바위틈 생활이 오죽했을까. 전쟁은 끝나고 평화의 때를 맞이했으나 모든 것을 다 잃고 오직 목숨 하나 붙들고 쓸쓸하게 귀향(歸鄕)하는 베냐민 지파 족속들의 모습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잊지 않아야 함을 교훈한다. 이 모습이 아무 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하나님 면전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 가난한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해 본다.

그리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23b)로 끝이다. 다시 자기들만을 위한 건축 이야기 밖에 없다. 역시 하나님이 없다. 여기까지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다면 뭔가 이전과는 다른 흔적들이 있어야겠는데 인생들의 자기 행동 밖에 없다. 이처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서살아가는 베냐민의 후예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 방정식이 전반부(21.1-12)와 동일하게 반복된다. 문답(Q/A)을 독점한다. 마지막 페이지 끝부분까지 온통 사람일기로 가득 채워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말씀하실 여백(餘白)이 없다.

 

    ∙회중의 장로들이 가로되 ”(16)

    ∙또 이르되 하였음이로다.”(17-18)

    ∙또 이르되 하고”(19)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0)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하겠노라 하매”(22)

 

하나님은 부재(不在)중이고 사람의 들만이 주류를 이룬다.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처방하고, 이렇듯 모든 일을 다 사람들이 처리한다. 그야말로 사람일기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보여주는 현상이 어떤 수준인가? 사람 소리만 난무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쳐지지 않는다. 벧엘에 하나님의 성소와 -당시는 단일(중앙)성소의 시대다- 언약궤와 제사장이 있고(20.26-28a), 제사가 있고, 율법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이 있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사람 밖에 없다. 본문은 온통 사람 일색이다. 이것이 사사기 교회의 영적 밑그림이다.

이스라엘이 위의 형식에다가 담아낸 내용은 이것이다: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13)

    ∙맹세하여 이르기를 저주를 받으리라.”(18)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22a)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22b)

 

생색내기도 아니고, 베냐민에게 잘 보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 사실 평화”, “저주”, “은혜”, “는 이스라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 언어다. 정말 하나님이 이 말대로 일하시면 어쩌려고 생각나는 대로 말들을 막 하는지 모르겠다. 말은 말대로 하고, 행동은 행동대로 하는 이중성(二重性)이 참으로 놀랍게 곳곳에서 발견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까 계속해서 이들의 언행은 파행곡선을 그린다.

한편 200명의 여인이 부족하자 이번에는 실로의 여인들 가운데 납치’(유괴) 작전을 벌여 교묘하게 자신들의 맹세를 빠져나간다(19-23). 그러나 이것은 율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을 유괴하면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그 유괴범을 반드시 죽여라.”(21.16,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자신들의 말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까지를 버린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존이다.

붙들어’(23)는 약탈과 강도 행위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다(6.2). 그런데도 이를 은혜무죄를 이야기하다니(22) 사사기의 그림이 이처럼 일그러질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몹시 시리고 아프다. 한 타락한 레위인이 한 여인을 강간했듯이 이스라엘이 600명의 여인을 집단으로 강간하였고, 한 레위인이 타락했듯이 온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사사기 이후의 가나안(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하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부스러기 묵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기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이 참담하고 황무한 가나안을 거니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인간은 끝까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면서 막 가고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무엇 하나 새롭게 각성하고 부흥된 흔적이 없는데 베냐민 자손이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갔으니 곧 각기 돌아갔더라.”(23-24)는 자막(字幕)이 흐른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사사기의 마지막 외침은 이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의 결론이다. 이것이 사사기가 고발하는 인간이다. 좀 답답하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진다. 내가 왜 그럴까? 하나님도 조용히 계시는데 내가 왜 좁쌀처럼 뭔가 말하려고 하는가? 이스라엘이 말 한 것들로 충분한데 내가 거기에 뭘 더 추가하겠다고 말 할 기회를 찾고 있는가?

하나님은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에서 사사기 기자로부터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신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사사기 때에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으셨다는 사뭇 이단적인 발언을 들으시고도 아무 말씀 없으시다. 순간적으로 사사기에 계신 하나님을 너무 소흘하게 묵상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기 이전에 부글거리는 내 마음을 통해 비춰진 사사기만을 관찰하지는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恩惠) 말이다. 하나님은 사사기 교회를 노아 홍수에 버금가는 심판의 모델로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너무 지나친 추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을 거부하고 독립선언통해 홀로서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묵묵히 심판을 집행하시는 공의(公義)의 하나님의 속성을 은혜의 하나님의 속성으로 덮으시사 사사기 교회를 보존하신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을 향해 백성이라, 그들이 사는 곳을 가나안이라 부르신다.

다시 복음으로, 복음 앞에 선다. 인생은 결코 희망이 아니다. 사람이 득세하는 곳에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난 이 진리를 믿는다. 끝까지 최종적인 선언을 종말 이후로 미루시고 사사기를 당신의 넓은 품에 품으시는 하나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사도의 고백을, 만약 우리시대에 사사기(사사기후서)가 쓰여진다면 그 고백을 함께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18-21)

 

하나님은 사사기 이후를 이처럼 은혜로 채워 가신다. 인간의 이야기는 무수한 숙제만을 남기고 막을 내리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십자가의 은혜로 맡으신다. 사사기의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품으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지 않는 한 사사기는 희망이다. 하나님이 허물 많은 사사기를 포기하시지 않는 한 사사기는 희망이다. 이 사랑과 은혜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계속되는 한 가나안과 사사기 교회, 그리고 우리 역시 희망이다.

 

사사기 뿐만 아니라 죄가 더한나를 이처럼 대우해 주시는 하나님!

찬미 예수!

성령님, 날 도우소서!: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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