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일기.盟誓日記(삿 21.1-12)

20211213(묵상)

  

 

 

맹세일기(盟誓日記)

Jdgs. 21.1-12

 

    본문 관찰

 

    경솔한 맹세와 통곡(1-7)

    맹세의 악순환(8-12)

  

 

맹세신화(盟誓神話)

 

사사기 20-21장을 현대적으로 이해하면 이렇다.

교회 안에 못된 죄를 범한 동성연애자(19.22)들을 치리하기 위해 총회가 모였는데 1/12의 세력 정도가 이러한 교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교회는 최종적으로 동성연애자들 편에 선 성도들에게 교회의 권징에 순복하지 않으면 출교할 것을 결의한다. 이 불순 세력은 평소에 교회 출석도 하지 않던 이웃들까지 동원하여(19.15-16) 2번이나 교회의 결정을 무력화 시킨다. 저들의 계속되는 승리는 이들의 주장과 삶의 질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온 교회 안에 퍼졌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가 저들 편에 넘어가게 될 위기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세력을 심판하심으로써 저들의 승리를 실패로 역전시키신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은 것은 상처와 혼돈뿐이다. 온 이스라엘은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무엇보다 베냐민 지파는 50,100명이 죽고 겨우 600명이 남음으로써 한 지파가 이지러지고 말았다(20.35,46-48, 21.3). 이스라엘은 미스바 총회일기(20.1-11)에서 다음 두 가지 맹세 때문에 참으로 난감한 딜레마에 빠져서 통곡하고 있다(1,5). 사사기 교회에는 잠시도 평화가 없다. 이렇듯 상생(win-win)을 위한 것이 아닐 때 언제나 갈등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1]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7)

    [2]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5)

   

 

[1] 첫 번째 맹세(1,7)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

 

이스라엘은 베냐민에 비해 상대적인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베냐민 보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생각이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2) 또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3)

그런데 언뜻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성과 태도가 그럴 듯 해 보인다(2). 물론 전혀 부정적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행되는 일련의 흐름이 모두 이스라엘의 ’()로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말(1)에 의한 역시 자신들의 말(3)로 이어지면서, 이 말에 대한 대안(해법)의 말 또한 스스로의 언행(言行)만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이 본문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21장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스라엘의 말만 가득하다. 스스로 말하고, 그 말에 대한 해답 역시 스스로 말하는 이스라엘, 그리고 그 말대로 행동하는 이스라엘,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교묘한 죄는 이것이다. 죄는 자신들이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전가하는 묘한 역설이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다. 종교성(2-4) 역시 자문자답(自問自答)이다.

자신들의 맹세(결정, 결의)가 하나님과 그 말씀보다 위에 있다. 맹세 우선주의다.

자기들의 결정이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한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회의에서 결정했으니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란다- 번복할 수 없다.

자신들의 죄를 -맹세가 얼마나 무모한 죄인가?- 고백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의 인과론적 추론을 철저하게 타자(他者) 베냐민에게 전가한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명분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죄의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가? 첫 단추(1)를 잘못 끼웠으면 깨끗하게 시인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해야 할 피조물이 도리어 어찌하여”(3)라고 항변하고 있으니, 가나안 교회가 건강할 리 만무(萬無)하다. 끊임없는 자기 논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가나안 교회가 더 깊은 불행 속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시대 교회를 생각한다. 언제가부터 원로그룹에 속한 사람의 말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유력한 힘의 그룹들이 -종교 귀족들이다- 교회 안에도 생겨났다. 말씀보다 어떤 회의의 결정과 결의와 전통을 더 앞세운다. 자기 확신과 경험이 적절하게 섞여서, 거기에 종교성까지 갖추었으니(2-4) 그야말로 부동의 드림팀이다. 사람의 ’()이 공동체를 장악하면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 계셨던 것처럼 사사기 교회 밖에 계실 수 밖에 없다(3.20).

   

 

[2] 두 번째 맹세(5)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5b)

 

첫 번째 맹세에 대한 해법으로 두 번째 맹세가 사용된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두 번째 맹세는 베냐민 지파의 탈신앙(脫信仰)을 암묵적으로 동조한 교회 안에 또 다른 불신 세력, 이들이 골리앗으로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맹세가 어이없게도 첫 번째 맹세의 탈출구(脫出口)로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자란 기브아 불량배들의 죄악(20.10,13)을 멸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이 다함께 참여한 것에 비해 길르앗 야베스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니”(8b) 이들이 받는 징계야 뭐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무모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러니까 1절이라는 인간의 말 맹세를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말 맹세(5)가 도용된다.

그리고 길르앗 야베스 거민 가운데 젊은 처녀 400명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처참하게 죽는다(10-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베냐민을 심판하셨다면 길르앗 야베스의 불참(不參)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사사기적 불신인 셈이다. 그 결과 이들이 징계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을 시행하는 이스라엘의 태도와 방법은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사람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된다.

   

 

부스러기 묵상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1순위가 되면 하나님은 2순위로 전락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본문에 하나님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독백과 그에 따른 인간의 해법만이 가나안 교회 안에 물결치고 있다. 여기에 신앙의 명분까지 가세하니 생명 걸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사사기적 신앙이다. 결국 왕이 없으므로 사람의 말이 곧 권력이고 결정이자 왕을 대리한다. 결국 하나님의 부재다.

문제는 이것이 다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에서 자행되는 죄악이다는 점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가나안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모습이다. 죄는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해결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죄를 그저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인간적이고 인위적으로 사사기 교회를 각색해 버린 이스라엘, 결국 자신들의 맹세는 보존되고 지켜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치 십자군전쟁처럼 인간의 뜻을 위해 하나님마저 동원하여 일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매우 특이한 신앙을 양산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맹세(盟誓)인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신앙(信仰)인가? 질문은 나에게 있지만 해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에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기대하는 성도(聖徒)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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