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2 - 축복하며 살라하네!(룻 4.7-12)

20201011(양무리)

   

 

 

룻기12_ 축복하며 살라하네!

Ruth. 4.7-12

  

   본문 관찰

 

   [그 기업 무를 자]

   7 옛적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그 기업 무를 자 vs 보아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보아스]

       9 보아스 vs 장로들과 모든 백성

          ‘오늘 너희가 증인이 되었고

      10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모든 백성과 장로들]

         11 내일 - 여호와께서 같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상속자를 주사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세 종류의 사람들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기업 무를 자로서 보아스보다 더 우선 순위가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 -그는 아무개-, 그리고 보아스, 또한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로 구성된 증인들이다. 한편 보아스와 아무개의 이중창은 처음부터 화음이 맞을 수가 없었다. 둘 다 룻과 인생을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누가 되든 솔로(solo)일 수 밖에 없었고, 둘 중 한 사람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마침내 베들레헴 성문을 무대로 한 모든 백성들의 축복송이 합창으로 이어지면서 룻 드라마는 절정(climax)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1. ‘옛적을 기웃거리는 아무개: 그 기업 무를 자

 

그 기업 무를 자 아무개씨는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한다(7-8). 그것을 위해 까마득한 옛적 전례의식을 기억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법(기업 무를 자)은 버리고, 전례(전통)를 붙드는 자가 아무개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7)

옛적(7)이라는 단어로 보아 이 진통은 아마 룻 시대에는 그야말로 사라진지 오래된 옛 관습에 불과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율법의 특권을, 오늘(9,10)의 은혜를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과거의 전통으로 대치시킨 셈이다. 그는 마침내 축복의 기회를 포기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신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나오미, 특별히 룻에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찰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쩌면 그의 합리성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자기 관점에서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으며, 그래서 룻을 통하여 주어질 축복의 보따리를 몽땅 보아스에게 넘겨주고 만다. 넝쿨 채 들어온 복덩이 룻을 발로 차 버린 셈이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損害)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

이 짧은 6절에 라는 표현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온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옛적의 시각에 들어온 겉으로 드러난 룻 밖에 보이지 않은 셈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당장 눈앞의 결과만을 생각한다. 멀리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읽어내지 못한다. 언제나 과거라는 옛적의 전통에 얽매여 살아간다. 철저히 예측 가능한 일들만을 따라간다. 이러한 판단과 결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이 서 있기 때문에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 더 위대하게 보지 못한다. 육의 세계 너머에 있는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이다.

   

 

2. ‘오늘의 은혜를 읽어내는 보아스: 기업 무를 자

 

보아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아무개씨의 입을 주목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될까? 인위적으로 바꿀 수도 없다.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였던지라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율법이 명하는, 보아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가 입술로 말한 6절에서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8절에서 그가 증인들 앞에서 행동으로 최종적인 결단을 끝내기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8)

그는 성급하게 열매를 따려고 아직 설익은 과일을 탐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성숙해 있었고, 일이 마쳐지기 전까지는 행동하지 않는 책임 있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8절로 1순위 그 기업 무를 자는 축복의 반열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마침내 이때가 보아스에게 행동할 때다. 보아스는 서서히 자신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룻 프로젝트’(Ruth project)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오늘(9,10)이 오기까지 그는 지나온 무수한 시간들을 인내했다. 그랬다. 좋은 것을 얻으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소중한 것 일수록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경솔하게 행동했다가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보다 앞서다가는 될 일도 그만 꼬이고 만다. 이런 경우는 우리 인생살이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보아스가 10명의 증인으로 채택된 장로들과 베들레헴 모든 백성 앞에서 베들레헴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은 크게 둘로 되어 있다(9-10). 그것은 기업 무를 자가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룻과의 혼인을 청첩하는 결혼 기자회견으로 되어있다. 첫째, 엘리멜렉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살 것이다(9). 둘째, 모압 여인 룻은 아내로 맞아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10).

   

 

3. 내일을 소망에 담아내는 증인들: 베들레헴 축복송

 

사사시대에도 여호와께서’(11,12)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대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남겨 놓으셨다. 그래서 말인데 믿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방학했다.”, 더 나아가 교회 졸업했다.”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핑계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섰는데 그게 통할 리가 없다. 아무리 영적 암흑기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일지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깨닫도록 하신다. 한 사람 건강한 보아스를 통해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한 시대를 축복할 수 있다.

이어지는 증인들의 축복송은 참 아름답다. 보아스의 솔로(solo)를 이어 받아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의 코러스(chorus)로 화답하는 본문의 축제마당을 상상해 보라. 인생은 이처럼 아름답다. 아니, 이렇게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은 참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시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던 시대에, 앞서 보았듯이 우선권이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어두운 시대에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증인입니다!”(9,10,11)

남을 못살게 하고, 상대방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한 사람을 패가망신(敗家亡身)하게 만드는 쪽에 손을 드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짧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이 아닌가! 인생을 마이너스로 살지 말고 플러스로 살자! 남은 우리 인생 행로를 이처럼 넉넉하게 살아가기 바란다. 축복하는 반열에 서라.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박수 쳐주며 살자.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지켜보는 그런 사람이 되자. “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더니 복 받았습니다라고 간증하며 살자.

 

축복송(11-12)

베들레헴 사람들은 라헬과 레아, 그리고 다말을 다시 기억할 정도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한 사람이 바르게 살면 그 시대가 바르게 사는 일에 깨어나게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마음껏 축복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축복하며 살자.

룻이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그렇게 우리도 믿음의 명가를 세우기를!

룻이 다말처럼 쓰임 받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쓰이기를!

양무리교회가 이 시대 하나님의 기쁨이요 희망이 되기를!

 

사람은 입술의 열매대로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기한 법칙이라 말하고 싶다. 놀랍다. 그래서 주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다(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비운의 가수들은 한결같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노래를 불렸다. “간다, 간다부르던 김정호는 그렇게 갔구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역시 어느 날 그렇게 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고 노래했던 그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밝고, 긍정적이고, 박수 치면서 흥겹게 부르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은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다. 개그맨 가정은 아직 이혼 부부가 없다.

링컨(A. Lincoln) 대통령은 자기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심성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대략 알 수 있다.

수 십 년 고행 끝에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法語)를 남겼으며, 8년 동안 드러눕지 않고 장자불와(長坐不臥)의 초인적 극기수행을 함으로써 성불(成佛)의 경지에 이르렀다던 성철(性撤, 1912-1993)이라는 분 여러분 다 아시죠? 그런데 이 성철 스님이 1987????여원???? 잡지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는 그가 조계종 종정으로 있을 때인 1987석탄일법어인데 제목 하여 사탄이여 오소서!”이다. 으스스 하죠? 읽어 보겠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

 

그가 천추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열반송(涅槃頌)은 불교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볼 때 그토록 처절하게 몸부림쳤을지라도 구원의 진리를 한 획이라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열반송을 들어보자.

 

   열반송(涅槃頌)

   生平欺誑(생평기광) 男女群(남녀군)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하였으니

   彌天罪業(미천죄업) 過修彌(과수미)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活焰阿鼻(활염아비) 恨萬端(한만단)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된다

   一輪吐紅(일륜토홍) 掛碧山(괘벽산)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축복하며 살라하네!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한 민족을 축복할 수 있다.’

이것이 룻기가 보여주는 우리네 인생을 향한 영적 교훈이다. 우리는 자칫 룻기를 효성 지극한 효녀 룻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효도했더니 복 받았더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끝내 버릴 가능성이 많다. 물론 룻이 축복의 반열에 선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기고 효도했던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룻이 룻된 것은 효도라는 행위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이렇게 성경을 풀면 성경이 매우 가난해진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을 한 지붕 안에 묶어 주심으로써 영적으로 곤고한 사사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로 하여금 서로 믿음으로 격려하고, 축복하며, 소망 가운데 내일을 바라보도록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혼돈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의 눈을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을 주목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어떻게 당신의 신실하신 역사를 계속 이어가시는가를 목도하도록 하신다.

마침내 참담했던 1장의 분위기는 2-3장을 지나면서 반전(反轉)을 시도하더니 마지막 4장에 와서 완전히 바뀌고 만다. 어둡고 칙칙한, 실패와 좌절의 사람 이야기로 막을 열더니 감사와 축복으로 역전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반전되었다.

하나님이 부재중이시던 1장은 희망 부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도록 그분께 겸손히 왕좌를 내어드린 4장은 희망과 새생명으로 뻗어나가는 새순의 싹을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보아스가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한 약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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