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0 - 기업 무를 자1: 아무개(룻 4.1-6)

양무리교회(20200920)-룻기강해10

   

 

 

기업 무를 자(1): 아무개

Ruth. 4.1-6

  

   본문 관찰

 

   1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4 내가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내가 무르리라

   5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6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노라

   

 

아무개: 그 기업 무를 자

 

   ▪1순위자: 아무개(‘그 기업 무를 자’)

   ▪2순위자: 보아스

 

4장으로 넘어오면서 룻기는 <고엘언약>을 지킬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 기업 무를 자’(‘아무개’)로 소개되는 익명(匿名)1순위자, 그리고 2순위자 보아스다. 과연 이 두 사람 중 누가 룻을 통해 나오미의 꺼져가는 가정을 다시 회복하는 기업 무를 자’(redeemer)가 될 것인가? 이 둘이 서로 갈리는 이유(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이 4장 서두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다. 먼저 다시 고엘(‘기업 무를 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구약의 말씀(율법, 언약)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레위기 25장으로 간다.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25.23-28)

 

이 말씀(율법)에 의거해서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친족’(3.12)인 제1순위자 아무개가 권리를 행하기 위해 갑자기 마지막 장에 등장한다. 이로 보건데 분명 단역 출연자인 것 같으나 진행되는 방향에 따라서는 주연 버금가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기업 무를 자와 관련하여 이 사람 아무개그는 어떤 사람인가.

   

 

1. 그는 단숨에 축복의 문에 서게 된다.

 

앞서 이미 3장에서 그의 출현이 암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그는 당당히 기업 무를 자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에게는 율법이 부여한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보아스의 설명을 듣고서(3-4b) “내가 무르리라고 말한다. 말씀에 따르겠다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성문에 앉아 이 말을 듣고 있는 보아스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을까? 그런데 이어지는 5절의 부연 설명, 즉 구체적인 옵션을 듣고서는 그만 생각을 바꾸고 만다. 왜 그랬는가?

 

(1) “내가 무르리라는 말이 나중에 취소된 것은 자신이 입게 될지도 모르는 손해때문이었다(6). 그렇다면 처음에는 이 거래가 이익이 날 것이라 판단했던 것 같다. 이것은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믿음에 의한 반응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단지 계산이 빨랐던 것이다. 엘리멜렉은 이미 죽었고, 따라서 이제 나이든 나오미 마저 죽으면 엘리멜렉의 소유지가 모두 자기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율법에 대한 지식도, 말씀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는 이해타산(利害打算)에 대단히 밝았다. 그런데 이방의 모압 여인 룻을 책임져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룻에게 자식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은 엘리멜렉 나오미 자식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허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전혀 이득이 없는 거래라고 판단한 것이다.

 

(2) 나오미와 룻과 같은 약자들, 율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이웃들의 삶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문제나 형편, 고통이나 아픔은 전혀 고려조차 않았고,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하는 경제적은 숫자만을 생각했다. 율법이 그에게 이러한 특권을 값없이 주었으나,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버리고 오직 손해와 이익이라는 경제법칙만을 따라 행동한다.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말씀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철저히 실패한 셈이다. 그 결과 그는 찾아온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는 자기 것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3) 그는 당장에는 손해가 아닌 이익처럼 보이는 편을 택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당장 좋아 보이는 것, 이익이 되는 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쪽으로 줄을 선다. 그러니까 아무개성도는 룻의 엑스트라(들러리)가 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고엘찾기의 주연이 되는 축복을 알지 못했다. 어리석은 인생이 아닌가.

   

 

2. 영적 거듭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사람은 시작된 하나님의 복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모든 판단의 중심이오직 자신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 그는 자기가 얻을 수 있는 몫의 복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알게 된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굴러온 복을 스스로 거부해 버리고 마는 영적 무지에 있다. 지금 무엇이 인지, 그리고 무엇이 인지, 무엇이 진짜 손해이며 이득인지 분간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1) 복을 발로 저 멀리 차 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영적으로 득이 되는 자리인지, 아니면 큰 화가 임하는 자리인지 빨리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과 점검이 필요하다. 어물거릴 여유가 없다.

비록 코로나(COVID-19) 시대라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기회들은 쉼 없이 내 곁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자신 생각에 아니올시다라고 그러면서 믿지 못하니까 그의 믿음대로 아니올시다로 끝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순종의 길은 따르지 않는데 집합금지’(예배금지)라 그러면 두 말 없이 예배자의 영광을 버린다. 우리는 예배의 선수가 되어야지 예배의 영광이라는 성도의 1순위를 버리면 안 된다.

 

(2)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라.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방주를 실물로 보여 주시면서 -마치 룻을 베들레헴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다. 거대한 방주가 그들 앞에 준비되어지고 있었다. 이제 구원의 방주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방주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24.37-39). ‘아무개가 그런 사람이다. 룻이라는 축복의 통로가 있는데 그 축복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3)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교회가 있고, 사역이 있고, 봉사할 곳이 있고, 헌신할 대상이 있는데, 그리고 늘 나는 기업 무를 자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은 하는데 오늘 우리 시대의 기업 무를 자인 많은 성도들이 정작 아무개씨처럼 축복의 문턱에서 그만 뒤돌아서 버린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무개보아스중에 누가 똑똑하다고 느껴지나요? 그에게는 상식과 지식과 돈의 시세 판단 능력은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율법의 도를 알고 믿는, 사사들이 치리하는 때를 율법을 성취하는 것으로 만들어 낼 영적 지혜는 없었다. 이것이 또한 현대의 많은 아무개들의 결정적인 문제다.

 

(4) ‘아무개씨의 신분은 기업 무를 자 1순위자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결승전에 올라온 최종 후보가 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그 수준은 전혀 아니다. 신분과 수준 사이의 부조화가 문제인 것이다. 사사시대(1.1)에 그의 신분은 기업 무를 자이지만 수준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신분은 그리스도인인데 수준이 세상 사람과 동일한 사람, 그래서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으면 말씀을 붙잡고, 손해 볼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말씀(믿음, 신앙, 교회, 하나님)의 끈을 놓아 버리는 사람, 그가 바로 아무개씨의 후예들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마저도 자기 편리와 목적을 위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간 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5) 고엘제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정도로 아무개는 하나님의 법에는 정통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삶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이해타산 적이다. 이런 그가 은혜에서 탈락하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 6.7)인 셈이다. 성경을 많이 알면 뭐하나. 교회에서 훈련을 많이 받았으면 뭐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그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다. 부끄러운 아무개의 후예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1순위자는 아무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사사시대에 이런 복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 복을 믿음(율법,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상식과 판단에 따라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오늘은 기업 무를 자로 살겠다고 하지만, 다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그럴 뜻이 없다고 뒤돌아 선다.

   

 

세상방정식 vs 하나님의 나라

 

인생은 언제나 두 지평 안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양분된다. 세상은 언제나 자기처럼 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 보이도록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것들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복을 1순위로 받을 수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눈으로 보고, 또한 생각해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선택한 수준이다. 당장은 좋아 보였으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그는 처음되었으나 나중 된 사람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무개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은 하늘의 축복을 피해 다닌다.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다. 믿음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 없는 사람이다.

룻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아직 제4막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개의 후예인가, 아니면 보아스의 후예인가? 당신의 선택은 믿을 만 한 것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따르라. 말씀을 따르라. 이것이 가장 확실하다. 아무개와 보아스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교회와 철학관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주일성수와 예배 없는 주일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말씀과 내가복음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성령님과 사이비 영성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하나님과 돈 사이에 머뭇거리지 말라. 믿음의 부모와 세상적 부모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복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 길이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1순위자로 행하라, 순종하라, 따르라, 드리라 말씀한다. 이에 따라 순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생각, 세상적인 유익, , 자기 욕심과 욕망을 따라간다. 우리의 삶에서도 순간순간 아무개처럼 언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개에게 돌을 들 수 있을까?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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