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9 - 아직 은혜의 여백(餘白)은 남아있다(룻 3.14-18).

20200906(양무리교회)-룻기강해9

   

 

 

아직 은혜의 여백(餘白)은 남아있다.

Ruth. 3.14-18

  

   본문 분석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16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8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룻, 새벽을 기다리며

 

은 깊어만 간다. 참 분주하게, 쉼 없이 달려왔다. 인생을 셈해 보고, 돌아돌 여력도 없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했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고, 모압과 다른 낮선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 정착하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 밤, 룻의 청혼을 받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 14절에서 그만 시간이 멈춘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룻은 사랑을 고백한 그 밤부터 타작마당을 떠난 새벽까지 무엇을 생각하며 긴 밤을 지새웠을까? 룻에게 잠시 주어진 그 밤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14 |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 꿈 많던 소녀 시절에는 백마(白馬)를 탄 기사의 손에 이끌리어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짖고, 밤이면 가든에서 파티를 여는 젊은 날을 꿈꾸었을 법도 하다. 모압은 룻에게 충분히 그런 꿈을 꾸도록 했을 것이다.

아마 그때는 이방 땅 모압 태생이었기에 하나님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니 하나님 없는 자기 자신의 꿈의 날개를 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들레헴이 고향인 젊은 청년 나오미의 아들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기 앞에 나타났고, 룻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하지만 룻에게는 여러 가지가 걸렸을지도 모른다. 우선 타국인이다는 점이 서로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어떻든 두 사람은 결혼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꿈 많던 신혼시절이었다. 그러나 꿈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시어머니 한 분 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현실이 그랬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랬다. 이러 자고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룻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깨어났다. 무슨 말인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리 없이 자기 곁을 떠났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분명하게 그녀의 마음에 각인(刻印)되는 것, 오직 하나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룻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반전(反轉)시켜 버리고 말았다.

룻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베들레헴을 떠난 자들을 통해, 흉년(고난, 심판)을 피해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난다. 어떻든 이런 이들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룻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할 말이, 정리할 것들이, 기억되는 것들이, 감사할 것들이, 하늘의 것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룻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남아 있는 여백을 새롭게 만들도록 섭리하시기 시작하셨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다.

 

(1) 받은 은혜()를 세어 보아라.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날들, 부모님과 고향산천(故鄕山川)을 떠나 온 이후 이처럼 여유 있는 시간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깊어 가는 밤을 지새우면서 룻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마저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모압을 떠나올 수 있었던 힘, 홀로 되신 시모를 따라 패가망신(敗家亡身)하다시피 무너져버린 엘리멜렉의 가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야 했던가에 대한 밀려오는 숫한 질문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니 하나님의 섬세하신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기가 막히게 진행되어 온 지난날들을 그녀는 추억했을 것이다. 지나온 인생을 하나님 안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 여백을 하나님으로 채우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되다.

a. 룻은 점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섭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처럼 찾아오신 하나님의 섭리에 기꺼이, 또한 믿음으로 순종(응답)해야 한다는 결단을 새롭게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b. 지금까지도 그랬다면 앞으로는 더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갈 것인가? 룻의 가슴은 이처럼 강렬하게 뛰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냥 지나가는 일상이었다. 뭐 특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특별기도회를 하고, 철야나 금식을 하고, 작정헌금을 하고, 뭔가 서원을 하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미리 좀 큰 헌금을 드리거나, 시간과 자신까지 헌신해 교회를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을 기다리는 우리 식의 열심으로 그렇게 버틴 세월도 아니었다. 그러찮은가. 그냥 일어나 추수하는 밭에 나아가 이삭줍기에 바빴고, 시어머니 섬기기에 분주했고, 무너진 한 가정(가문)을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한 그냥 평범한 삶에 자신을 던진 것 뿐이었다.

 

(2) 삶이 무절제하지 않았다.

룻은 동이 트기 전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우리는 지금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지샌 밤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지금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산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을 보아스의 풍성한 타작마당이 압도해 버릴 수도 있다. 혹은 보아스는 좋겠다. 나는 언제나 보아스처럼 될꼬?”라며 부러움에 취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타작마당이라는 그림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a. 룻을 보아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어떤 것들을 무기로 해서 보아스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룻은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신데렐라처럼 살지 않았다. 이 밤이 지나면 자신은 신데렐라가 되리라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b. 룻은 시모 나오미, 보아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향해 일하시기 시작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다 맡겨 버린다. 이것은 룻의 믿음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무절제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었다. 보아스만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보아스 뒤에 누가 있는가? , 하나님이 계신다. 그렇기에 룻은 결코 경거망동(輕擧妄動)하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통과하고 있는 밤의 그림이다.

c. 자기를 지키며, 절제하며, 조절하며,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룻이 그랬다. 그녀는 오늘 때문에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내일 때문에 오늘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열정과 욕망과 헛된 것으로 그 밤의 여백을 채우겠다며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여백은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그래서 조용히 그 밤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3) 약속을 지켰다.

룻이 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룻은 보아스가 말 한 새벽까지 그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피차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14a) 정확하게 일어났다. 단잠에 빠져버림으로 말미암아 크나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룻은 시작도 지혜로웠지만 끝은 더 지혜로웠고 만족스럽다. 자신이 소중하다면 상대방 역시 소중하다. 긴 밤이었지만 보아스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정도로 그녀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아 있는 여백

 

, 보아스, 나오미는 다 한결 같이 자신들의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자신들이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여백이 보인 것이다. 이것이 은혜요 바로 은혜의 여백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정리하면, 이러한 여백을 자신들이 채워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 인생의 여백(餘白)을 하나님께 드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수 없는 여백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수단으로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욕망을 일지감지 포기한 것이다. 그것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좋은 여건이 또 있을까?

이쯤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 또한 마치 태풍이 쓸고 간 황량한 들판처럼 볼품없는 사람들로 전락한 룻과 나오미가 걸어 온 인생을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잃었으나 두 여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작은 불꽃과도 같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절규를, 오직 소망이 주께 있음을 믿으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었던 두 여인의 인생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신의 사랑과 은혜의 여백에 담아내신다.

그들은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두 여인이 실패한 인생의 너덜너덜한 파편들을 부둥켜 안고서, 아무도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아직은 실낱처럼 남아있는 그들을 당신의 사랑이라는 은혜의 여백을 통해 바라보셨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할 정도의 패인이었다. 아름답던 모습은 온대 간대 없고, 완전히 거지가 되어 귀향하고 있었다. 그의 소생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의 여백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보라!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아버지는 일그러진 아들을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렇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탕자를 보았으나 하나님은 아들을 보았고, 우리는 실패를 만들었으나 하나님은 잔치를 만들었다. 모든 인생은 이처럼 제로 포인트에서 시작한다.

   

[보아스의 여백]

 

15,17 |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보아스의 여백은 15절이다. 아무도 이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본 사람도 없다. 증인이 없는 셈이다. 마치 지난 밤의 일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들 그 누가 이 일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보아스는 지금 룻 앞에 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지난 밤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난 밤 룻과의 약속을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13b)라고 말했었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우리가 보아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정직할 수 있고,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의 행복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쁨의 몫까지를 지혜롭게 배려한다. 분명 보리 여섯 되를 룻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나오미의 것이다(17)는 보아스의 말은 룻과의 약속이 룻만의 것이 아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 나 보아스는 룻 뿐이 아니라 나오미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의 여백이기를 원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여백을 보셨다.

  

[나오미의 여백]

 

16,18 |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고하고,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는 자신이 기록한 인생 10를 정확하게 진단했다. 하나님보다 조금 더 앞서 갔던 지난 세월의 부끄러움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야 할 몫의 여백까지를 넘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아스를 통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이어가시는가를 볼 것이라고 말한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여백을 맡겼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믿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기다리며, 인내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도리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사례는 출애굽의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의 군사들이 밀고 올라오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 때에 모세는 이렇게 선포했다. 이것은 일명 출애굽의 여백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4.13-14)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채워 넣으실 그분의 여백을 보라이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인가? 나오미는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이루어 가실지를 숨죽이며 지켜 볼 것이라고 말한다.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2. 아직 남아 있는 여백을 발견하라.

 

내 인생의 빈 노트에 무엇을 그려(채워)야 하나!”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꿈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는 열심히 쌓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고, 맞추기도 하고, 도려내기도 하고, 오려 붙이기도 한다. 제각기 자신이 기대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대로 만족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인지 아닌지는 그 자신이 더 잘 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도대로 오늘 여기까지 왔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 아닌지 말이다.

인생은 AS가 불가능하다. 인생은 연필로 쓰다가 틀리면 다시 지우고 쓰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그려 놓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바로 거기서 멈추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경험만으로도 남은 여백은 내가 채우면 또 하나의 실패일 뿐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여백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채워주시도록 해야 한다!

 

(1)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과 사명과 비전과 달란트의 여백(달란트)을 발견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 이를 보고 알게 하는 ‘QT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안테나와 주파수와 다이얼의 여백에 나를 맞추어야 한다.

 

(2) 가정, 배우자,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라.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없는, 그리하여 아빠나 엄마의 말이 곧 법()인 가정은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여백이 없는 경우다. 자녀들은 자동 인형이 아니다. 부모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는 수단이 아니다. 이쯤에서 조용히 나를, 가족을, 가정을 돌아볼 수 있는, 그래서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질 여백이 남아있는지를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한다.

 

(3) 교회에서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깨닫는 것만큼이 그가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사람이 일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감된다. 아직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백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흔들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고 계신다.

 

남은 여백만큼 그는 행복하다.

아직 여백(餘白)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여백은 없고 그래서 끝이 났지만 하나님의 여백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믿는 자는 복되다. 하나님의 여백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자녀들에게, 우리 양무리교회 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하늘의 여백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만큼 꿈이 있고,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점()이 아니라 하나의 선()이다. 거대한 하나의 진행형(ing)이다.

그 여백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당신의 여백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채워가시는 여백을 보고 있는가? 무엇보다 신앙의 여백과 기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백이 그 사람의 영성이고 믿음의 용량이기 때문이다.

 

여백(餘白) 없는 사람들

소위 말하는 인생의 위기가 왜 찾아오는가? 더 이상 삶의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뒤치다꺼리하다 황금 같은 40-60대를 보내 버렸다. 이제 자녀들은 더 이상 자신의 품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주장만 늘어 놓는다. 세대차이라고 말하거나, 구식(舊式, 구닥다리)이라고 놀리고, ‘쉰세대라고 일축한다.

늘어가는 것은 몸무게요, 허리 둘레요 -‘배 둘레 헴’(?)이 많아진다-, 얼굴에는 기미에 주름살이 늘어가고, 그 곱던 손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고, 옷장에 있는 몇 년 전 바지가 다리를 집어넣을 때 벌써 걸려서 들어가지 않고, 자식들은 커서 둥지를 떠나고(빈둥지 증후군), 뭘 먹어도 많이 먹지를 못해 외식도 부담이고, 그래서 집에서만 먹자니 서글프고, 옷은 입어도 맵시가 나지 않고, 모두 들 다 앞서 가는데 자신만이 뒤로 후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기 시작한다.

 

여백의 하나님

그럴수록 아직 남아 있는 당신의 여백을 보라. 무엇으로 채워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나오미는 자신의 남은 모든 여백이 제로 포인트였음에도 그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워내고 있지 않은가? 아직 남아 있는 은혜의 부스러기들일지라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하나님보다 먼저 나의 남은 인생의 여백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교만함이다. 아직 내 인생의 여백은 남아 있다. 아직 나의 여백이 채워지지 않았다. 룻에게서 배우는 여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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