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8 - 한 밤의 약혼식장, 말씀으로다(룻 3.9-13).

20200712(양무리교회)-룻기강해8

   

 

    

한 밤의 약혼식장, 말씀으로다.

Ruth. 3.9-13

 

 

   본문 관찰

 

   10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11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13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보아스의 타작마당은 룻의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타작마당에서 또 하나의 시작을 감행한다. 그것은 결단이요, 도전이요, 하나의 승부수다. 마치 동족(同族)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4.16b) 결심했던 에스더의 심정으로 타작마당으로 나아간 것이다.

정리해 보면, 왜 보아스 옆에 누웠는가? 시모 나오미의 명을 받았지만 그것은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다. 룻은 타작마당 이후의 자신의 전부를 철저하게 보아스를 통해 이루어질 말씀에 맡긴다: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b) 이처럼 희망의 출구는 오직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것이 불리하고, 오해를 낳을 수 있고, 더는 율법에 의지한다지만 그러나 그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룻은 말씀에 자신 전부를 올려 놓는다. 사사시대가 심상찮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룻의 구혼(求婚)

 

과연 룻과 보아스의 은밀한 만남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무엇보다 그 결과를 무엇이 주도하는가?

 

9| 기업 무를 자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자신의 이불 속에 들어와 함께 잠을 자고 있다. 어쩌면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어야만 하는 그런 생사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룻이다. 그런 그녀에게 보아스는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다.

때로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부르실 때 쓰시는 표현이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유사한 구약의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그것은 일명 얍복 나루터에서 일어났던 야곱의 씨름이라 부르는 장면이다(32.22-32).

 

   창세기 32                                                룻기 3

   *밤에(22)                                         *밤중에(8)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의 옷자락을 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9)

   *네 이름이 무엇이냐?(27)                         *네가 누구냐?(9a)

   *야곱이니이다(27)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9)

     →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9b)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10a)

 

날이 밝으면 형 에서를 대면해야 하는, 죽음보다 더 무섭고 떨리는 문제 앞에서 천사의 옷자락을 붙들고서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라며 절규하고 있는 야곱, 또한 보아스의 이불을 덮고 누워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9)라며 청혼하는 룻, 그러나 만약 두 사람 모두 이 요청이 거부되는 순간 날이 밝으면 야곱은 형의 칼 앞에, 룻은 음란한 여인이 되어 돌을 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룻은 생명을 건 고백 앞에 서 있다.

바로 이들을 향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가 누구냐?”라고 말씀하는 소리,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네가 누구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와 같은 주의 음성을 듣는 이 시간이기를 바란다.

  

 

보아스의 약혼사(約婚辭)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7a)

 

보아스 역시 타작마당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뜻 밖에도 한 밤의 청혼식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청혼에 보아스가 응답할 차례다. 과연 약혼일까, 파혼일까. 보아스는 타작마당에서 교만하지도 않았고, 한 밤의 불청객인 룻을 의심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흑심을 품지도 않았다.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날 때만 해도, 특별히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분과 긴장이 룻과 보아스를 돌러 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미 구상이 다 되어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아무 막힘 없이 척척, 그러니까 룻을 모델로 하는 아름다운 사랑, 행복한 미래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곧바로 이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이 보아스의 다른 점이다.

 

10| 여호와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흐름을 빨리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어느 어두운 밤 이불 속에 알 수 없는 사람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9절처럼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청혼할 때 우리는 긴장, 당황, 혼란스러움, 정리되지 않음, 놀람 때문에 정신 차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보아스는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역시 보아스는 큰 그릇이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받아 사는 것을 이야기할 정도로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사람을 보는 눈도 달랐다.

룻의 기준은 빈(), (), 나이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이 말은 그런 것들이 불필요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룻은 더 중요한 것을 보았다. 그것이 룻의 영성이다. 룻은 나오미를 끝으로 꺼져가는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았다.

이처럼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할 때 기준을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의 기준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 , 나이, 조건, 학벌, 고향이 결혼의 기준이 아니었고, 보아스 역시 룻의 진짜 아름다움을 귀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볼 수 있는 뛰어난 신앙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1)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처음 모압을 뒤로 하고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올 때는 미약할 때 그지없는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시작을 오늘처럼 풍성한 것으로 이끈다. 이것이 룻의 잠재력이었다. 점점 더 풍성한 삶, 더욱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런 삶의 한 부분이다. 점점 더 복되고, 긍정적이고, 풍성하고, 발전하고, 부흥하는 삶, 점점 나아지고, 탄탄해 지고, 커지고, 미래(내일)가 있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11| 내가 네게 다 행하리라.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의 존재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그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인이라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룻은 비록 짧은 3개월 정도의 베들레헴 생활이었지만 인정받는 사람으로 우뚝 선다.

현숙하다의 뜻은 강한, 용감한, 남자다운, 능력, 수완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룻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힘과 지혜가 있는 여인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에서 -가정, 친구, 학교, 직장, 교회 등등-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가슴(기억) 속에 훈훈하게 살아있는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all) “룻은 현숙한 여인이다고 인정할 만큼 지정의(知情意)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실 불과 3개월 전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때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하는지라”(1.19b)였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반대로 온 성읍이 현숙한 여인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12-1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이행하리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타작마당을 율법을 지키고 성취하는 약혼식장으로 만든다. 보아스는 가까이에서 룻을 지켜본 것에 기초해서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녀의 청혼을 수락한다(10-11).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았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앞세우지 않았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어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10-11),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12-13)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1)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12)

그는 모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규례를 정확하게 밝힌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룻의 청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의 빛 아래서 이 일이 말씀대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아침에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13a)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욕심, 욕망, 자기 생각, 자기 열심이 앞서지 않았고, 자기 감정이나 기분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 혹은 흥분을 앞세움으로써 일을 그르치게 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릇 우리의 신앙이 그래야 한다. 환경에 너무 민감하거나,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변하는 신앙은 깊은 신앙이 아니다. 또한 보아스의 지혜로운 신앙을 보게 된다. 그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미리 차단한다. 좀 더 큰 일을 위해 사소한 것들을 절제하고, 구별할 줄 아는 넓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신앙에 있어서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다.

 

(3)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네게 이행하리라.”(13b)

보아스는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신뢰만큼 자유하게 된다.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 순종하기를 원한다. 이렇듯 사사로운 일을 말씀 앞에 두지 않았다. 자기 목적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사사들이 치리하는 때에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사사시대의 한 복판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하며 사사시대를 말씀으로 역류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놓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이것이 룻과 보아스의 약혼식장에 흐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룻기의 핵심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했다.

이점은 룻이나 보아스가 다 같았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살았다.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왔고, 가난한 자의 상징인 이삭줍기에 나섰고, 시모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으며, 그리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다.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이방인이요,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요, 가난했고, 말하자면 모든 면에 있어서 룻은 소위 배우자 이 아니었다. 소위 말해 함량 미달이다. 여기까지가 세상적 기준이다. 따라서 그것만큼 보아스의 영적 통찰(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보아스는 분명 오늘속에서 내일을 보았다. 겉모양이 아니라 속사람을 볼 줄 알았다. 세상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룻 그 자신을 볼 줄 알았다. 무엇보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 또한 이 말씀의 빛 안에서 룻을 본 것이다. 그것만큼 보아스는 건강한 삶을 살았고, 영육간에 청청한 삶을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었다.

보아스의 영적 실력을 보라. 보아스는 룻이라는 보석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었다. 그는 룻이라는 한 알의 밀알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알아보았고, 발견한 것이다. 보아스와 룻, 룻과 보아스를 보면서 우리 각자에게도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며, 세워주며, 하나님의 작품으로 지어져 가는데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신앙의 영적 동반자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발견한다. 바로 옆에 있다!

가깝게는 가정(家庭)이고, 부부(夫婦)이고, 형제 자매들이다. 그리고 처음 시작으로 올라가 보면 부모님이고, 나를 신앙적으로 인도해 주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해 준 목회자가 자리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처럼 세워주고, 열매 맺어가도록 해 주는 룻이기를, 또한 보아스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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