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7 - 말씀에서 답을 찾다(룻 3.1-9).

20200614(양무리교회)-룻기강해7

  

 

 

말씀에서 답을 찾다.

Ruth. 3.1-9

 

   본문 분석

 

   1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7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9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의 방황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마침내 변화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터진다: “‘행복이 있기를 원하노라!”(2.19b,20a) 사람은 입술의 열매대로 산다. 이제 더 이상 실패를 비관하는 나오미가 아니다(1.13c,20-21).

   

 

나오미의 꿈, 시작되다.

 

나오미에게는 꿈이 있었다.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민을 갈 때 꾼 꿈은 모압에서 상영되다가 거기서 10년만에 그만 막을 내렸다. 모압 잔치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돌아왔을 때 베들레헴은 그녀를 조롱하고 빈정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새 꿈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3장의 나오미는 어떻게 1장과 다른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지금 나오미를 주목하는 이유들이다.

 

1-4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룻은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1.22) 왔고,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2.23) 지낸 걸로 보아 최소 3개월 정도의 추수기를 집 밖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나오미는 언제나 변함없이 이삭줍기를 위해 집을 나서는 며느리를 지켜 보았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고백(1-4)은 이런 3개월 이상의 긴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나오미의 꿈은 여기서부터다. 생각해 보면 지난 10, 모든 것을 다 잃은 줄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님은 룻을 주셨다. 룻과 함께 한 나오미는 이 3개월 정도 동안 일관된 흐름에서 답을 찾아간다.

 

   [한 주제 안에서의 일관된 흐름]

   ■보리추수(1): 왜 고향으로 돌아온 때가 추수 때였을까?(22)

   ■이삭줍기(2):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밭들 가운데 친족 보아스의 밭인가?(3- )

     룻의 이력을 아는 보아스(11-12)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는 무엇일까?(14-16,21)

   ■타작마당(3): 그것도 기업 무를 자로서, 또한 미혼(未婚)이 아닌가?(2.20b)

 

수혼제도(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 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구속제도(25.23-25)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네 형제가 가난

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중요한 것은 나오미와 룻은 오직 말씀, 그러니까 기업 무를 자’(고엘, 구속자, redeemer)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안식’(1)을 바라본다. 지금 룻기에는 성경, 곧 하나님이 말씀하는 고엘과 관련하여 수혼제도(25.5-6)와 구속제도(25.23-25)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나오미와 룻은 오직 말씀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구했고,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 후로는 말씀만을 붙들고 살기로 작정한다. 오직 희망을 말씀에서 캐내기를 열망하는 나오미의 변화를 보라! 자신이 말씀의 빛에 비추어 세상을 보니까 이미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영혼이 잘 된 건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룻에게 그처럼 은혜를 베풀리 만무하다. 보아스는 말씀의 사람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베들레헴으로 귀향한 지난 3개월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룻을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닫고서다. 나오미는 이를 말씀 안에서 깨닫고 발견한다.

 

5-6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5)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6)

 

마침내 나오미는 룻에게 말씀을 근거로 한 인생의 승부를 요청하고(1-4), 룻 역시 시모 나오미와의 말씀 나눔에서 순종하겠다고 결단한다(5). 이야기는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효도를 담아내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요 희망이다는 믿음의 결단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 청혼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다. 그녀는 이방 모압 여인이다. 모세의 법대로 하면 모압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23.3). 이러한 금기를 깨면서까지, 그것도 정상적이게 보이지 않는 밤에, 더더욱 홀로 잠을 자고 있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룻은 신분 상승, 재산, 쾌락 등과 같은 동기에 따라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면 자칫 잘못하면 음란한 여인으로 고발되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20.10). 따라서 말씀에 따른 믿음의 결단이 이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한다. 그렇다, 말씀이다.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한 밤의 청혼식: 룻의 고엘승부

 

   [보아스의 노래] - 타작마당과 노적가리에서

   행복하여라!

   수 없는 바람과 가뭄, 그리고 뜨거운 태양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빼앗지 못했구나.

   감사하여라!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받으소서! 주여, 타작마당은 당신의 것이나이다.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한계와 위험을 무릅쓰고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까? 모든 비난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목숨)을 건 도전을 말이다.

이것은 룻이 믿음 안으로 들어온 이후 두 번째 결단이다. 첫째는, 본토-친척-아비 집인 이방의 땅 모압을 떠나 시모와 함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축복의 땅,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마치 신약의 탕자처럼 베들레헴으로 왔을 때가 바로 첫 번째 결단이었다. 그녀는 신앙(믿음)을 택했다.

둘째는, 오늘 본문의 결단이다(6-9). 바로 구혼(求婚, proposal)이다. 이 구혼(청혼)이 진행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라(1-5 6-9). 룻으로서는 대단한 결단이다. 그러나 그녀는 시모 나오미의 명대로 다(all) 순종한다. 무엇에 의지하는가? 율법이 정한 말씀이다.

정리해 보자. 마침내 모두가 다 말씀 앞에 선다. 놀라운 것은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기도 하다.- 시모 나오미도 말씀 앞에 서 있다. 물론 룻 역시 말씀 앞이다. 그리고 보아스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사시대라는 혼탁한 시대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이 명하는 대로 움직이고 언행하고 있다. 이것은 희망이다.

 

8-9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은 주저하지 않는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9b) 룻이 사용한 옷자락’(9)은 이미 보아스가 사용했던 날개’(2.12)와 같은 단어다.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왔다고 말했었다. 룻은 이 말을 지금 3개월 후에 그대로 받아 보아스 당신의 웃자락’(날개)으로 자신을 덮어주는 그런 보호받기를 원한다는 뜻의 청혼을 하고 있다(16.8 참조).

시어머니는 4절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으나 룻은 더 적극적이다: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c) 이것은 오직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믿음의 선언이다(2.20). 시모 나오미의 말씀 위에 서 있는 믿음을 룻이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순종은 말씀(율법)에 명시된 기업을 무를 자를 통한 가문의 보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았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5.25). 룻의 순종은 말씀으로부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그녀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이끈다.

이렇듯 말씀에 대한 믿음은 시모 나오미에 대한 순종을 낳았다. 시모와 며느리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호 신뢰와, 그 말씀대로 살고야 말겠다는 깊은 신앙이 있었다. 생각해 보라. 전혀 상식(풍습, 관습,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모의 요청을 어떻게 룻이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이처럼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둘러싼 한계상황들 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더 깊어서다. 나는 어떤가? 나는 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의 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는가?

   

 

부스러기 묵상

 

말씀만의 답이다.

하나님께로 다시 귀향하자 모든 것이 순리대로다. 이를 나오미가 모를 리 없다. 룻을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나오미, 시모의 제안에 그대로 순종하는 룻, 이들에게서 말씀을 따르는 자의 복을 발견하게 된다.

말이 쉽지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씀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무모하고도 무지한 선택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걸음걸이는 복되고 아름답다.

그렇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맞고 옳다는 것을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을 통해 드러내시고 성취하신다. 이럴 때 비로소 룻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마침내 나오미의 간증이 나의 간증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내가 보아스가 될 수 있는 기회의 문 앞에 서 있다. 무엇 때문인가. 오직 말씀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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