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6 - 나오미 스타트(룻 2.17-23)

20200510(양무리교회)-룻기강해6

  

 

 

나오미 스타트

Ruth. 2.17-23

  

   본문 관찰

 

   17 -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

   19 나오미 -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룻 -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은 보아스

   20 나오미 -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보아스 은혜(Hesed) 베풀기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

   

 

복 받기, 은혜 베풀기

 

본문은 나오미의 일생에 있어 또 하나의 전환점을 소개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를 살아온 여인 나오미! 그녀는 모압으로 도피한(1.1-5) 구약의 탕자다. 그런 그녀가 10년 만에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한다(1.6-22). 과연 이번에는 어찌될까? 이 일은 룻을 통해 보아스를 만나는 은혜로 이어진다(2.1- ). 마침내 회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며느리 룻의 이삭줍기라는 헌신에서부터 비롯된다. 룻은 오늘도 묵묵히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비록 그것이 가난한 자로서, 이삭줍기를 하는 현실일지라도... 때문에 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런 이야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과 비슷하고도 평범한,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 것 같은, 묵묵히 지켜가는 그런 일상에서 일어난다.

고아와 과부와 객의 몫인 이삭줍기를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이다. 그녀는 가장 낮아졌음에도 절망, 자포자기, 비관, 불평, 의무감, 한숨 쉼과 같은 그런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왜냐? 다 잃었지만 하나님을 얻었기 때문이다(1.16-17). 비록 이삭줍기라는 아무 것도 없는 밑바닥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와 같았을 때 신앙고백을 간증에 담아서 나눈 적이 있다: ‘비록 괴로운 날들일지라도 그것도 하나님 안에서 충분하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4.11-14)

 

 

룻의 효(, 17-18): ‘네 부모를 공경하라!’

 

먼저 룻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이삭줍기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언젠가 합격 인터뷰에서 한 젊은 청년의 고백이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불편한 것 뿐이다.” 룻이 그랬다. 룻은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추수 벌판으로 나아간다. 건강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더 놀라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무엇인가 어떤 이야기를 전개해 가신다.

 

(1) ‘보리 한 에바’: “그것을 가지고 그 주은 것을 보이고”(18a)

베들레헴에서의 룻 이야기는 아주 작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한 20남짓한 보리 자루인 보리 한 에바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룻의 손에 들려진 참 적은 보리 한 에바를 사용하신다. 룻은 그것을 가지고”(18a) 시모 나오미에게로 간다. 룻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할 밑바닥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밝고, 맑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섬긴다. 내가 이러려고 모압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왔겠는가 하지 않았다. 이삭을 주어가며 살아가야 할 최악의 상황이지만 최선을 다한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 아닌가.

 

(2) 부스러기: “그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18b)

룻은 보아스에게서 받은 은혜를 시모와 함께 나눈다.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처럼 사랑을 나눈다. 각박하다고 생각했던 베들레헴, 자신의 생각처럼 이기적일 것이라 믿었던 베들레헴에도 그랬으니 10년 전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간 것 아니었던가- 이처럼 이웃을 생각하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나오미에게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 은혜는 이처럼 사소한 것에서 싹이 튼다. 이렇듯 나의 조그마한 섬김이 너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 있다. 헌신도, 섬김도, 격려도, 사랑도 이처럼 작은 것이 누군가의 영혼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

 

 

나오미 스타트(19-23): 복과 은혜 쪽으로!

 

이제 나오미다. 나오미는 모압을 떠나 올 때만해도, 그리고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올 때만해도 그녀는 영적침체에 그만 허우적거렸다. 영육간에 모든 게 다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는 룻을 통해 시작된다.

 

1. 룻은 나모미의 영혼을 깨어나게 한다(19-22).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시모에게 주는 우물()과도 같은 룻을 통해 한 생명을 소생시키신다. 나오미가 다시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때 그녀의 입술에 있었던 고백들이다.

나를 마라라 칭하라! 전능자가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21a)

여호와께서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괴롭게 하셨거늘”(1.21b)

 

(1) 그런데 보라.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20a) 이제 그녀의 입술에 복이 있기”(19), 그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한다(20)는 고백을 토해 낸다. 놀라운 변화다. 이러한 나오미의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룻의 헌신과 사랑이라는 부모 공경(5)이다. 하나님은 룻의 부모 사랑을 이처럼 사용하신다.

그녀는 이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잃었던 신앙을 다시 찾은 것이다. 어디까지 활짝 피어나는가? , 하나님의 복을 고백하는 자리까지다. 인생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드디어 나오미는 깨닫고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좀 복을 만들어 보겠다고 -아니, 만들 수 있다고- 몸부림치던 모압에서의 10년이 얼마나 불신앙이며, 죄악이었는가를 지금 나오미는 보고 있다.

 

(2) 나오미의 이어지는 고백을 보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b). 여기 는 하나님으로 해석할 수 있다(번역본 가운데 KJV, NASB, 현대인을 위한 성경은 이 해석을 취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압으로 이사를 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나오미는 보아스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다(OL): ‘보아스 뒤에 하나님이 일하신다!’ 놀랍지 않은가. 한 사람의 아름다운 헌신과 부모 공경은 나오미로 하여금 드디어 신앙의 재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소소한 부스러기에서도, 한 에바의 보리자루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그렇다.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하나님까지 동원하기엔 좀 너무 시시하고 작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소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은혜의 사람은 불과 바람과 폭풍 가운데서가 아니라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다.

 

(3) 보아스는 우리 기업 무를 자중 하나다(20b; 25.23-28 참조). 다음 시간에 하자. 그러기에 앞서 한 가지만 생각하자면, 율법을 버렸던 자리에서 율법을 사모하는, 율법을 기억하는, 율법을 적용하는, 율법을 앞세우는, 율법이 역사하기를 소망하는 신앙으로 나아간다. 말씀을 문제 해결의 근본으로 삼기 시작한다.

 

2.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23)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 또한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그래서 이삭을 주우며 산다(오늘). 1장에서 위대한 신앙고백과 결단을 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음에도 현실은 이렇다.

하지만 거기서,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내가 어둠 속을 걸어갈 때면바로 거기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룻은 이처럼 서서히 회복되어져가는 시모 나오미의 신앙을 보며 그녀와 함께 마침내 율법 앞으로!’(기업 무를 자, 20b), 말씀의 명령하심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나오미는 룻을 통해 말씀의 회복을 꿈꾼다. “사사들이 치리하는 때에”(1.1a)도 되는 집은 된다.

 

   사사시대를 극복하는 이 사람을 보라!

   시어머니의 신앙이 회복되는 것을 위해 쓰임 받는 며느리가 되라!

   자녀들의 일생을 영적으로 짚어 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라!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가 되라!

 

세상은 보아스, 룻과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룻이기 때문에 보아스를 만났다. 보아스를 만나서 룻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보아스이기 때문에 룻을 만난다. , 이처럼 영적으로 회복되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계속해서 3장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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