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5 - 보아스 스타트(룻 2.8-16)

20200209(양무리교회)-룻기강해5

  

 

 

보아스 스타트

Ruth. 2.8-16

 

   본문 분석

 

   10 -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11 보아스 -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13 -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일상의 신앙

 

룻기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그런 장면이 없다. 다른 성경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여 이르시되와 같은 방식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데 룻기에는 꿈이나, 묵시나,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는 그런 개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룻기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

사실 룻기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신앙 방식이나 우리나 그리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너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일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룻기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룻기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는다.

그래서 오늘은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 보아스를 통해 우리도 이처럼 살아가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섭리 앞에 서 보도록 하자. 이것이 평범한 일상이라는 시각에서 본문을 드려다 보려는 이유다.

   

 

만남의 기준

 

룻기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보아스를 주연(主演)으로 룻기 무대에 올리신다. 보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룻과 결혼하라는 그런 말을 듣고 2막에 등장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보아스와 룻을 이스라엘 사사기 무대에 등장시키신다. 과연 이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할까.

사실 룻의 케스팅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좀 불편하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고 평가받았던 어두운 시대였다. 모두가 다 사사기의 어두운 영적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 여인 그것도 이방 모압 여인이라는 게 중요하다.- 룻은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어간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확신이 룻에게는 있었다. 하나님은 그 룻을 지금 절망의 세대 이스라엘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고서 사사시대를 이기는 법을 가르치신다.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8-10 -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8)

룻은 이삭줍기를 하는 가난한 이방 출신이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이라는 감추어진 보배를 알아본다. 보아스는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의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그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인생을 바라본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관점, 신앙적 관점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방식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사사시대의 생존법, 그러니까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 룻을 살펴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기준은 어떤 것들인가? 사사기 식이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먼저, 상대방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본다. 여기에는 희생도, 헌신도, 수고도 찾아 볼 수 없다: “손해 볼 장사를 왜 해!” 예화 - (팀 켈러, <탕부 하나님>, p. 베드로의 돌-1, 2--> 둘 다 자신을 위해)

또한, 세속적인 기준은 현재의 모습, 보이는 것이 기준이다. 얼마나 많이 배웠고, 부모 배경이 어떻고, 그러니까 재산-직장-외모-출신(고향) 따위의 외적 요인을 먼저 고려한다. 성품이나 잠재력, 다시 말하면 신앙과 같은 내적 자질에서 비롯된 미래의 가능성이나 보이지 않는 실상은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그러니 잘 될 리가 없다. 만약 보아스가 이러한 기준을 가진 현대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룻에게 말을 걸거나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룻과 대화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아니다. 룻기에 쓴 게 전부다. 이것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다음 11절에서 밝혀진다.

   

 

보아스 스타트

 

룻은 이삭줍기로 연명해야 할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먼저 이삭줍기가 뭘까? 이에 대한 모세오경의 율법을 보자: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9.9-10, 23.22, cf, 24.19-22)

모압을 정리하고 하나님께로 왔으나 가장 미천한 이삭줍기에서 시작한다.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그 이삭줍기를 이미 소천한 시아버지의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하게 된다. 하나님은 룻의 발걸음 보다 한 걸음 더 앞서셨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시작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따른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놀랍지 않은가.

 

11-13

보아스란 이름의 뜻은 민첩’, ‘재빠름이다. 보아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괄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자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일에 재빨랐다. 그의 이웃 사랑은 10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았다(2.20). 이처럼 그의 부()는 단순히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았다. 그는 주신 부를 적절하게 쓸 줄 알았던 영육(靈肉)이 모두 부요한 사람이다. 보아스는 자신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가난한 이웃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사람으로 지금껏 하나님 앞에 살아왔다. 무엇을 기대하고? 아니다. 그냥 그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다.

보아스는 사사시대임에도 자기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마음을 따라 살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섭리로 인도하시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써 가신다. 이게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보아스에게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보아스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죄 많은 우리 인생들을 십자가로 품으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보는 높이까지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통해 세상을 보았고, 그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통해 이웃을 보았고, 동시에 이처럼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처럼 사람을 볼 수 있는가? 그가 11-12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네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렀느니라.”(11)

사실 보아스는 아버지 살몬과 그의 어머니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안다.- 기생 라합(Rahab)의 사이에서 태어났다(1.5). 창녀인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땅인 여리고 성에 거주했으며, 믿음으로 여호수아의 두 정탐꾼을 숨겨 준 댓가로 이스라엘의 보호를 받았다(2.1- ). 그녀 또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본다. 보아스는 이미 그런 어머니에게서 탁월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목숨을 걸고 여리고 전투에서 살아 남은 라합의 신앙은 아들 보아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룻이 모압이라는 이방의 여인이라는 것보다, 목숨 걸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던 그녀의 신앙에서 자기 어머니 라합의 신앙을 보았을 것이다. 룻에게서 자신의 어머니 라합을 보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무너진 사사시대의 영적 토대를 다시 세우는 길임을 알았다.

세상이 다 사사시대의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주의 군사되어 주의 일 이루어거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을 붙든다.

자기 어머니 라합이 이스라엘과 아버지 살몬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 그리하여 자신이 오늘 존재하게 된 것처럼 자신의 가까운 친척 나오미의 뒤를 따라 아무 것도 보장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룻 또한 자기 어머니 라합처럼 보호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보아스는 자신의 아버지 살몬이 라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자신 또한 이방인 룻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차원 높은 신앙의 소유자였다. 보아스에게는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3.28)라고 하는 복음이 있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는 능력이다.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12)

 

이처럼 철저히 은총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아니 일원이 되려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 앞으로 빈 손 들고 회개하며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마치 룻기 1장의 룻처럼 교회(그리스도) 밖에 있던 어떤 사람이 룻기 2장의 룻처럼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떻게 그를 맞이해야 할까?

우리는 흔히 세상에 대해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도움이 필요해서 곡식 베는 밭에 찾아 온 이삭줍는 사람들에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대해서는 인색하거나 무정하기 그지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 못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주의 백성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위해 온 사람들에게 육신의 일을 손에 쥐게 해서는 안 된다.

보아스를 보라. 그는 룻을 멸시하지 않았다. 보아스는 룻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용납하고 있다. 날개(12)는 보아스의 옷자락(3.9)과 같은 단어다.

   

 

축복의 통로

 

14-16 - “식사할 때에”(14)

보아스를 보라. 섬세하고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보아스의 모습은 단순한 동정 그 이상이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14)에서처럼 룻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식사의 교제 안으로 과감하게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이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한편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표현을 살펴보면 우리는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높고, 깊은 차원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언젠가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15.21-28)에서 그녀를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 = 라는 식으로 말씀한 완벽한 경멸의 언어다. 어떻든 이방인은 상종하는 것 자체가 금기(禁忌)시 된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식탁공동체안으로 부르고 있다.

 

아름다운 만남

 

보아스만 만나려 하지 말고 룻처럼 준비하라! 룻만 만나려 하지 말고 보아스처럼 살라!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것만큼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많은 경우에 어떤 배우자를 원하십니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것 다 보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직히 자수하여 광명 찾자. 아니죠? 믿음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추가시키죠? 아닌가요? 사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많이 소개했는데 아니더라구요. 그래 이제는 속지 않아요.

우리의 관심은 보아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아스로 세워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니까 룻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아스를 보라, 그리고 룻을 보라. 이들은 겉 포장지를 보지 않았다. 이들은 속사람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 상대방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만남과 서로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우리 안에도 이런 사랑이 주님과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 그럼 이제 우리도 룻과 보아스처럼 또 맞는 내일을 그냥 그렇게 묵묵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 된다. 일어나면 QT하고, 잠시 기도하고, 하루라는 일상을 바르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룻과 보아스가 가르쳐주는 영성이다.

이 삶은 특별하지 않다.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어떻게? 오직 주의 말씀과 지금 내가 듣고 알고 믿고 받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가장 큰 능력이다. 신앙을 따라 산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신앙은 평범하다. 그냥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생활이다. 우리의 삶이 날마다 이벤트고, 사건이고, 뉴스고, 그래서 예측하기 어렵다면 얼마나 어려울까. 우리 룻과 보아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자. 그러다가 또 모이는 공동체로 부르시면 해처럼 밝은 모습으로 만나자. 룻기처럼 사는 삶, 단순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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