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3 - 베들레헴, 아직 희망이다(룻 1.15-22).

20191110(양무리교회)-룻기강해3

  

 

 

베들레헴, 아직 희망이다.

Ruth. 1.15-22

  

나오미는 인생의 전환점을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자신의 모압 10년이라는 부끄러운 과거와 결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미 그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과 결단의 표명일 수 있다.

남편은 땅에 묻고, 두 아들은 가슴에 묻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세월, 그 안에 들어있는 슬픈 인생사, 비극의 가족사, 고통의 민족사,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흔들리는 믿음의 역사 이 모두 다를 다시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형벌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모압을 떠나며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나오미의 고백들은 하나 같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아픔들뿐이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이제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바로 그것과 결별해야만 한다. 슬픈 비극이자 실패의 노래는 여기 모압에서 끝내야 한다.

  

 

Goodbye, Moab!

 

나오미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뒷짐 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 쪽으로 언행심사(言行心事)를 돌이킨다. 이게 무엇인가. 회개다. “내가 한 것은 다 어긋났으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행하시옵소서. 처분대로 하십시오, 나는 따르겠습니다라고 감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누워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믿음을 따라 구체적으로 결정하고 움직인다. 이게 돌이키는 회개다.

 

15| 굿바이, 모압!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0년살이 모압을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나오미의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만감(萬感)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모압에서의 불신앙을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져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즉 모압에서 끼어든 하나님을 떠난 죄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개다. 다시 시작하는 베들레헴은 모압의 반복(연속)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너무나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10년의 고통을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과거와의 결별을, 그러니까 모압(사사기)과의 결별을 시도한다: “Goodbye, Moab!”

굿바이 - 분노. 절망. 실패. 고독. 열등감. 죄책감

 

19| 베들레헴 비아냥, 조롱, 쑥덕거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비웃음과 조롱, 멸시와 천대, 그리고 모욕과 비아냥거림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실패한 인생을 두고 벌이는 언행(재회) 치고는 좀 야박하다. 많이 듣던 말투 아닌가. 우리시대에 줄줄이 달리는 댓글과 어찌 그리 비슷할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참 남의 얘기하는 걸 즐긴다.

사실 베들레헴 백성들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을 형편이 못된다. 이들 역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1)를 살아가며 타락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 사이를 반복하면서 가나안이 이처럼 초라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 밖에 없다. 과거 이스라엘의 영광만을 곰탕 국물처럼 고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10년을 말이다. 나오미는 모압(세상)에서 그랬고, 지금 베들레헴 백성들은 베들레헴(교회)에서 그랬다. 그런데도 나오미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면 인생은 꼭 다른 사람을 입방아에 올린다. 그것도 잘 한 것에 대해서 박수하고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도 그녀를 위로해 주려 하지 않는다. 이게 세상 인심이다. 교회는 그러면 안 된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나오미가 위로 받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베들레헴이다. 돌아갈 곳은 베들레헴 뿐이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를 정죄하기에 바쁘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실패한 인생이 갈 곳이 없다.

그러나 교회는 나오미처럼 무너진 상한 갈대를 받아주어야 할 최후의 보루다. 교회는 죄인을 영접하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피난처다. 때문에 교회가 맛과 빛을 잃으면 그 시대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나오미가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으로 믿었던 베들레헴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인 교회다. 나오미처럼 상처난 자들을 용납하고 그로 하여금 새사람됨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다. 그런 따뜻한 성도로 살자. 그런 넉넉한 시어머니로 살자. 이처럼 넓은 가슴의 부모로 살자. 이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건강한 교회요 행복한 공동체다.

 

   ■ 20-21| 그럼에도 하나님 쪽으로 - 재결단

나는 지난 날의 나오미가 아니오. 나오미는 죽고, 마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여러분 곁에 왔다오. 나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요. 베들레헴은 나를 나오미로 기대했지만 모압은 나를 마라로 만들었다오. 내 인생의 결론은 마라라오. 무슨 얼굴로 나오미이기를 고집하겠소. 나를 기쁨이라 부르지 마시오. 나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내 이름은 슬픔입니다.”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향은 10년 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지금 현재가 초라하고, 부끄럽고, 실패한 인생이었다는 공개적 선언이다. 나오미는 이처럼 결단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회개를 토해낸다. 지난 10년의 모압 생활을 한마디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한다. 하나님과 베들레헴 앞에 정직하게 무릎을 꿇는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납하신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베들레헴은 그런 사람에게 준비된 안식처요, 그런 사람을 맞아주는 피난처다.

나오미의 고백을 계속 들어보자. 나오미는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변명하지 않는다.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직 죄인인 자신을 그대로 세운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간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단독자로 -계속되는 ’(일인칭 I)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심판대 앞에 정직하게 선다. 나오미는 눈물로 회개의 찬송을 부른다.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찬송가 4943)

 

그런데 객석이자 베들레헴 광장에는 오직 나오미의 죄를 정죄하는 청중들로 가득 차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거운 짐을 해결해 줄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시니까. 그녀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이 죄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아닌가. 이렇듯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이처럼 막다른 골목에 세우신다. 바로 그 때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는 때다. 이때가 구원의 날이다. 이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수납할 때다. 인생은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은 그 죄를 은혜를 받는 기회로 만드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진단한다.

 

(1)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0b)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괴로움을 올려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시간표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압이 괴로움이라면 그녀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시인이다. 그렇다. 나의 실패의 근원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라는 시인이다. 그러니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2)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21a)

하나님이여! 이제 나는 빈 손 입니다.” 풍족할 때는 하나님을 떠났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없어지자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실패마저도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다. 어렵고, 질병이 찾아와 시한부 인생이 되고,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기도의 제목이 쌓이는 바로 그 때가 여호와께서 비어 돌아오게 하시는 때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 앞에 뺄셈을 먼저 시작하신다.

 

(3)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21b)

죄인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Sin)의 정체가 그렇다. 나오미는 10<모압살이 보고서>는 하나님을 떠난 값으로 받은 징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가문의 멸문(滅門)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사실 죄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기 시작하면 해답은 없다. 따라서 죄의 책임이 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회복

 

나오미는 자신 같은 룻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과 함께 베들레헴 귀향 길에 오른 룻에게 모압과 베들레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명한다. 나를 따르려면 나처럼 모압과 완전히 결별하라. 이것이 룻을 향한 나오미의 최후통첩(最後通牒)이다. 여기에 대한 룻의 신앙고백(16-17)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22):

 

16-18| 신앙고백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렇게 해서 룻은 하나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다. 룻의 결심은 단호하다. 그녀는 베들레헴의 풍요를 쫒기 위해 결정하지 않았다. 비록 베들레헴은 아무 것도 보장하지 못할 곳일지라도 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신앙고백을 토해 낸다: ‘아무 것 없어도 하나님이면 충분하다!’ 성도 여러분, 당신도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한가?

 

22| 응답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온다.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1.6) 듣는 때를 기가 막히게 섭리하셨다.

 

(1)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일 때는 흉년이었는데 베들레헴 할 때는 추수기다. 놀랍다. 나오미는 소망 없던 땅이었던 베들레헴에 추수의 기쁨이 넘쳐나고 있음을 보았다. 나오미는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얼마나 허망하고 착각일 수 있는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읽어낸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회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되는가를 이처럼 생생하게 준비해 놓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인생들을 실망시키시지 않으신다. 나오미가 모압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고 그 흔적을 완전히 빼버리자 하나님은 그 빈 부분을 축복(은혜)으로 더하시기 위해 베들레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신다.

 

(2)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하나님께로의 귀향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신자가 서야 할 땅은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이 살아있는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성도의 소망이다. 하나님은 비록 지상의 교회가 천상(원상)의 교회에 비해 여전히 볼품없고, 비교할 수 없을만큼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 무리를 더 하시는 일을 기뻐하신다. 상처 받은 영혼들을 베들레헴으로 품으신다. 그렇다. 베들레헴, 아직 희망이다.

   

 

이제 다시 돌아갑니다!

 

자칫 나오미의 인생 역시 모압에서 마칠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모압에서 끝나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모압이 그녀의 마침표가 되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베들레헴 생활을 시작하게 하신다. 나오미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샬롬을 선물하신다.

아직은 기회의 시간이 남아있다. 하나님은 모압에서 나오미의 일생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시고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다시금 기회를 주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기 백성을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희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모압에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다시 기억하는, 그리고 그 품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회개라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 그에게 희망은 있다. 베들레헴은 아직 희망이다. 하나님이 계셔서다. 하나님은 추수 때에 맞춰 죄인들의 귀향을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문 밖에 서서 당신의 사랑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 버린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렇다. 나를 기다리신다. 오늘이 그날이다.

하나님은 모압에서 실패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다시 본향으로 귀향한 나오미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베들레헴에서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신다. 오늘 주께서 그래, 내 딸아 내 아들아 일어서거라. 내 너를 도와주겠다하신다. 베들레헴이 희망이다. 오직 우리 주님이 희망이다. 교회가 희망이다. 복음이 희망이다. 가자, 주님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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