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2 - 出모압기 서곡(룻 1.6-14)

20191103(양무리교회)-룻기강해2

 

 

 

모압기 서곡

Ruth. 1.6-14

      

      본문 관찰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3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귀향의 길목

 

엘리멜렉은 모압이 자기 인생의 끝 지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설마 갔겠는가. 살려고 갔으나 그의 모든 꿈은 신기루처럼 그렇게 모압에서 사라져 버렸다. 엘리멜렉은 가나안(하나님)까지 버려가며 모압(세상)을 짝사랑했으나 모압은 불과 10년만에 엘리멜렉을 버렸다. 모압이라는 소망은 마침내 비극적 종말로 그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가 버린 베들레헴에는 보아스가 준비되고 있고, 또한 엘리멜렉이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생을 마감하게 된 모압에서는 룻이 자라고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가슴 먹먹한 역설이란 말인가.

일전에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친일을 한 사람의 고백이다: ‘일본이 멸망하고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처럼 종말이 오고, 주님이 재림하시고,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이처럼 고백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죽음 이후에 다음 세상이 있는 줄 미처 몰랐어요.’

그러기에 모압의 나오미에게는 은혜 아닌가. 다시 얘기하지만 모압에서 이기에 더 그렇다. 다시 돌아올 길을 왜 갔을까 싶지만 이게 인생이다. 갈 때는 남편과 두 아들이 함께 당당했지만 올 때는 함께 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 잃고 며느리 하나 대동하고 눈물로 오는 길이다. 나오미이지만 나는 나오미입니다라 말하지 못하고 나는 마라입니다라 얘기할 수 밖에 없다.

잃어버린 10! () 많은 여인의 회한과 눈물, 시퍼렇게 타들어간 가슴과 영혼의 통증은 얼마나 아프고 또 시렸을까. 더더욱 이 절망의 10년을 나오미는 자신의 입으로 조금씩 토해 내야만 한다. 참 못할 노릇이다. 다시 기억의 창으로 아픔과 슬픔과 절망의 노래를 토해내야 하니까.

  

 

1. 하나님의 초청장: VISA 나왔습니다!

 

엘집사 부부 인생이 기록하는 룻기는 모압, 거기서 끝이다. 엘리멜렉은 딱 거기까지다. 살겠다고 갔으나 죽어 무덤에 묻히고 모압에서 끝이다. 그런데 그가 절망의 땅이라 생각하고 버렸던, 사사시대였고 고난의 땅이던 베들레헴은 10년이 지난 지금 소망의 땅으로 다시 회복되었다. 소망의 땅이라 생각했던 모압은 신기루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살겠다고 갔으나 죽어 무덤만 남긴 땅, 그곳이 하나님 없는 이방 모압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속한 베들레헴을 버리지 않았으며,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의 흉년의 가나안에서 마침내 새 일을 시작하신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는 말은 진리이다. 이것이 룻기 11장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6a)

 

베들레헴의 회복의 열쇠(key)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응답의 서곡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곳 모압에까지 들려왔다. 놀랍지 않은가. 희망의 소식은 모압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소리를 모압이라는 이방에서 듣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모압으로 갔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없는 모압까지 그 인생들을 찾아오셨다. !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어쩌면 하나님은 은혜, 기도, 예배, 찬송, 기쁨, 감사, 축복에서만이 아닌 절망, 이방, 세상, 실패, 눈물, 좌절, 고통의 흐느낌에 있을 때도 찾아오신다.

 

(1)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집 나간 자식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품에 품는 것처럼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신다. 비록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곳까지 찾아오신다. 우리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a.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타락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다시 찾아오셨다.

b. 가나안을 앞에 두고 광야에서 배신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c. 하나님은 때가 차매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4.4) 죄악된 세상을 찾아오셨다.

d.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는 사울을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찾아오셨다.

e.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고통을 아시고(3.7) 애굽으로 친히 찾아오신 것처럼 이번엔 베들레헴을 버리고 가나안을 떠난 사람에게 모압까지 찾아오셨다.

f.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죄인인 나를 찾아오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인간의 어떤 공로와 선행과 같은 행위가 있어서인가? 아니다. 인생은 죄를 심었지만 하나님은 의를 거두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각기 자기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들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심으로 인간의 불순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인생은 하나님의 저주를 자청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사 당신의 지고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다. ,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찬송가 4881절 중)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갑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찬송가 2721,2,4절 중)

 

(2)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인생의 기회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시작하신 유다의 회복에 대한 소식은 이방의 땅 모압의 나오미에게까지 들려왔다. 하나님은 나오미보다 먼저 일하시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시각이다. 나오미가 모압 생활 10년 만에 처참하게 추락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하나님은 유다 베들레헴의 회복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다.

a.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듣는가? 응답하라!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기회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비록 하나님 없는 이방일지라도 그곳에까지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찾아가신다.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셔야 할 사람들, 하나님이 아니면 영원한 생명 없이 점점 죽어가는 인생들에게도 하나님이 찾아가시도록 기도해야겠다. 그것이 불신자인 여러분의 부모님일 수도 있고, 아직도 예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동료일 수 있다.

b.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c.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 귀울이는 영적 갈급함이 점점 사리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적 목마름이 없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영적 기아현상이요, 심각한 영적 공항상태인 것이다.

 

 

2. 갈림길 인생: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6b,7b)

 

전환점이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마침내 무대의 막이 12장으로 바뀐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모습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이다. 먼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앞에 서 있는 두 자부들을 만나보자. 자부들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일어나(6b)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며 갈을 나선 것까지는 잘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이 일을 두 자부 스스로의 결정에 맡긴다.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8a)

 

하지만 시모 나오미의 제안은 단순히 베들레헴으로 오는 것을 거절한 것 그 이상이다. 그 이유가 매우 신학적이고 신앙적이다. 자신은 나이 들어 늙었으므로 생물학적으로는 베들레헴에 와봐야 별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결정은 너희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마침내 두 자부는 상식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적인 결정을 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우리네 인생 역시 이처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갈림길로 가득하다.

 

(1) : 모압 하나님/베들레헴(14)

룻기가 계속되면서 앞으로 룻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그러나 룻은 눈에 빤히 보이는 암울한 현실들(11-13) 보다는 나오미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다. 신앙적인 결단을 한 것이다.

 

(2) 오르바: 모압 그모스/모압(14)

그러나 다른 한 자부 오르바는 결국 모압신(그모스)에게로 돌아갔다(15). 그녀는 거기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녀는 단지 잠시 잠깐 하나님 쪽으로 걸었던 사람이다. 오르바에게도 나오미를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기회가 주어졌었다. 10년 동안 그녀는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웠울 것이다. 그 흔적은 룻기 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나오미의 모압 회고록에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오미와 결별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떠났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결실할 수 있는 싹이 나는가 싶더니 세상의 염려와 일락의 기운에 막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시들어 버리고 만다. 모압이라는 고난(징계)에서 하나님 쪽으로 걷겠다는 나오미, 그러나 오르바는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뜰에 있었으나 그만 거기까지다.

룻과 오르바, 이 두 사람은 아주 작은 차이를 보이는 것 같았지만 인생 근본이 뒤바뀌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된 셈이다. 이 두 여인 역시 그 결과를 어찌 알 수 있었으랴. 결정할 때, 결단할 때, 돌이킬 때, 하나님을 붙들 때, 바로 그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 조그맣고 미세한 차이가 인생 전체를 바꾸어 버린다. 이 부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참 중요하니까.

 

 

나오미의 고백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나오미는 변화되기 시작한다.

풍족’(23)할 때는 하나님의 시그널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다 잃고서 감을 잡는다. 그럼 진짜 다 잃은 것일까. 아니다. 일시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잃었어도 영원한 것이자 가장 가치있는 걸 찾았다면 잃은 게 잃은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모압 10년을 결산하는 나오미의 회고록, 즉 참회록이다(8-13). 나오미의 깊은 영적 통찰(spiritual insight)인데 그 분위기는 단조’(短調)풍의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풍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게, 그러니까 다름 아닌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나오미를 깨어나게 했다.

나오미는 신앙의 재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재기의 선언과 출발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모압에서 다. 그러므로 오늘 혹시 모압에서 방황하는 성도가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다시금 베들레헴을 향한 신앙의 재기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은혜는 거룩하고 복된 축복에서도 시작되지만 오리려 절망과 실패의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멜로디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13)

 

마침내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날이 오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4). 다 잃고서야 비로소 얻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다. 자신의 일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드디어 깨닫는다. “우연히, 자신의 실수로, 누구 때문에, 재수가 없어서 가 아니다는 것을 인정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나오미: 베들레헴/풍족 모압/빈 손 베들레헴/하나님

 

고향 땅을 기억하는 나오미를 만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루터기처럼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가슴이 있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탕자와 같은 실오라기 같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 곧 고백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그래도 갈 곳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 말이다.

 

(1) 돌아갈 하나님의 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가 최종적으로 서는 곳이 하나님인 사람은 소망이 있다. 다시 돌아갈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하 스데반)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송가 3101)

,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2) 나오미는 구약의 탕자다(15.11- ).

도피 징계 회개 회복의 순환(cycle)이 같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으므로라는 피 묻은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의 본질이 에게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10년이 필요했다. 남편 탓으로, 아들들 탓으로, ‘너 때문이야라고 실패의 원인을 전가하지 않는다. 탕자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다시 귀향길에 올랐던 것처럼 나오미 역시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귀향을 시작한다.

다 잃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잃지는 않았다. 아니, 다 잃고서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니 실패는 했지만 아직 절망하고 포기할 때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10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상복구 되지는 않는다. 어찌할까. 이렇듯 상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상처가 별이 된다. 내 안에 들어온 모래가 진주가 된다. 그리 하시는 이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다.

  

 

부스러기 묵상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아 돌아오라!”

 

오늘도 하나님이 부르신다(2.12-13, 3.7):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아 돌아오라!”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이렇게 쓰시고 싶어 하신다.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나오미는 모압이 가져다 준 10년 동안의 고통을 청산하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모압은 그녀에게 실패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러나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모압이 아니다. 그 일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품에서만 가능하다. 이 일은 하나님에게서 가능하다. 하나님만의 희망이니까. 이것이 그녀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이유다. 그렇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이유다.

하나님은 지금도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인간은 하나님을 포기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때다. 나오미처럼 귀향 준비를 할 때다. 나를 기다리시는 베들레헴으로 나설 때다. 하나님이 희망이다. 이제 긴 방황을 끊고 그분 품으로 돌아갈 때다. 지금 이 시간이 그렇다. 지금 내가 선 곳이 모압인 것을 알려주시는 지금 이 때가 은혜 받을 때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오 신실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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