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 - 모압변주곡(룻 1.1-5)

20191013(양무리교회)-룻기강해1

  

 

 

모압변주곡

Ruth. 1:1-5

  

   본문 관찰

 

   1 사사(士師)들의 치리(治理)하던 때

      그 땅에 흉년(凶年)

      유다 베들레헴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

   4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쯤에

  

 

모압 10년사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없다.

참 묘하다. 하늘 하나님 없는 땅의 인생들의 이야기만이 등장한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또한 가나안에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산다. 이해가 되나요? 이것이 사사시대 유다 베들레헴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신학적인 면에서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23.3- )는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말이다. 이처럼 룻기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의 후렴구를 반복하고 있다. 모세가 내다보고, 여호수아가 정복한 가나안은 이렇듯 점차 무너지고 있다. 유다지파, 메시아의 가계마저 이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점, 이것이 불길하고도 불안할 뿐이다.

엘리멜렉, 모압, 베들레헴은 어떤 모습으로 사사시대 사람들의 오늘과 내일을 비춰줄까. 룻기가 가리켜 주는 10년이라는 시간표(4)는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정직하게 해 주기 시작한다. 죽을까바 버리고 간 베들레헴은 과연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인가. 살려고 간 모압은 과연 희망을 가져다준 선물이었는가. 길지도 짧지도 않은 10년은 그 답을 정직하게 해 주기 시작한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a)란 무엇인가. 이때라면 사사기 안에 있어야 할 내용 아닌가. 하지만 사사들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부록처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일까. 그럼 사사였던 엘리와 사무엘은 왜 또 사무엘기에 들어 있을까. 룻기는 시작하자마자 뭐 이런저런 질문을 갖게 한다. 그만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묘한 여운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하셨던 이스라엘을 향한 영광스런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의 잊혀진 과거의 기록으로만 여기며 살았던 불행한 시대였다. 문제는 룻기의 사람들 역시 이 타락한 시대를 가슴에 품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던지려 하지 않았다. 반대로 자기 살 궁리만 했다. 철새처럼 썰물처럼 베들레헴을 빠져나간다.

정리하면,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1a)로 시작되는 것을 볼 때 그 뿌리는 사사기다.

 

(1) 그럼 사사기는 어떤 책인가?

사사기는 여호수아 사후(死後)로부터 사무엘과 사울을 통한 왕정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있었던 어두운 시대가 배경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인데 신앙과 삶의 질은 애굽과 방불하기 그지 없다.

또한 사사기를 알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서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여호수아서가 마무리되는 부분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 앞에서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24.16-18,21,24). 그러나 그들은 사사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을 버린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1.1)에 사사기 백성들이 만든 당시의 영적 분위기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

 

이 비극의 역사가 하나의 싸이클(cycle)이 되어 다섯 번이나 반복된다. 사사기 211-23절에서 싸이클의 한 모델을 찾아보자.

결국 정리하면 이렇다. 놀라는 것은 이 싸이클이 룻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2) 사사기 싸이클(cycle)

 

     [사사기 싸이클(Cycle)]

 

                 진 노

            ↗          

       타 락            부르짖음

              ↖              

          평 화  ←  사 사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2. 엘리멜렉

 

엘리멜렉(Elimelech, ‘내 하나님은 왕이시다.’)은 사사시대의 사람이다.

비록 흉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풍족했다(21). 모든 백성들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데 오직 그는 풍족했다. 그렇다면 이를 사사기 사이클에 넣어보면 이렇다. 비록 베들레헴은 흉년이라는 고난을 통해 사사기 사이클에 들어있지만 이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엘리멜렉은 풍족했으므로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는, 그렇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즉 베들레헴은 사사기 사이클이지만 엘리멜렉은 그것과 상관이 없는 평안한 상태였다는 뜻이다.

더 들어가면,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 중인데 엘리멜렉은 평화(Shalom)이다. 그런데 평화일 때 그만 심판으로 자신과 가족 모두를 품고 그 불속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풍족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풍족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실패한다. 그러니 엉뚱하게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한 것 아닌가.

바로 여기서부터 엘리멜렉의 인생은 전혀 다른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의 이런 면모를 보면 영락없이 현대인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그럼 왜 그가 모압으로 내려갔을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영적 패배주의자이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의 회복을 일지감치 포기해 버렸다. 그것도 하나님보다 먼저!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포기하는 것은 가장 고도의 교만이다. 영적 무기력이요, 시련과 싸워보지도 않고 사탄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해 버린 영적 패배주의다. 겉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이렇듯 속은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었다.

결국 엘리멜렉은 거듭나지 못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표상이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연단하여 가시지만 사탄은 영화 속에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완전히 죽게, 서서히 무너지게 만든다. 사사시대에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던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회복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패배주의자들이다.

 

(2) 모압을 피난처로 선택한 오만과 교만의 상대주의자이다.

그는 두 주인을 섬기고야 만다. 모압이면 될 줄 알았다. 모압이라면 흉년이라는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자만했다. 동시에 모압이라면 풍족을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잘 지켜줄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풍족하게, 풍족할 때 나갔다. 그런 선택이 자신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21). 흉년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안 되지만 풍족은 자신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용품(代用品)을 찾았다. 유다 베들레헴이 아닌 이방 모압이라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몰랐던 것은 모압은 절망의 세대의 종착지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다 잃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갔겠는가.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드는 줄 모르는 인생, 그 본보기가 엘리멜렉이다.

 

(3) 실리를 선택한 현실주의자다.

엘리멜렉은 영적인 안목에서 보는 것에 철저히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평안이라도 좋다는 것 아닌가. 흉년만이라도 면하게 해 다오! 유다 가문(지파)이면 뭘 하나? 4장에 가면 알게 되지만 다윗의 가문이 아닌가. 다윗의 가문이라면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야 가문이 아닌가. 그럼에도 정작 엘리멜렉 자신의 영적 수준과 안목은 바닥이다.

한편으로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 변화의 시기에 매우 발빠르게 적응하는 유연한 사람이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사양산업(斜陽産業)이 되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발을 빼고 잘 나가는 유망한 업종으로 전환하는 것과 같은 그런 선택이었다면 이야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지금 엘리멜렉이 선택한 것은 선민으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이방업종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이다. 기준이 없고, 원칙도 없고,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다.

 

(4) 자기(ego)만을 생각한 이기주의자다.

동족의 고난이야 어떻든 나(우리 가족)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그는 흉년(심판) 가운데 있는 유다 베들레헴에 자신을 드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제물될 마음이 없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짐으로 열매 맺으려 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이 영적으로 깨어나고 회복되는 일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헌신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살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자기 살기에 바빴다.

공동체의 영적 목마름에 대해서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궁핍에 대해서는, 이웃의 아픔과 눈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유다가 당면한 사사기적 삶의 모든 숙제를 다 남겨 놓고서 오직 자기 가족만 살길을 찾아 유다, 베들레헴, 신앙, 하나님을 시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흉년이 몰고 온 삶의 모든 숙제를 유다 베들레헴에 남겨 놓고 만다. 베들레헴이야 어찌되는 알 바 아니었다. 가족이 어찌되든, 공동체가 어찌되든, 교회가 어찌되든,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되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영적 이기주의자였다.

 

(5) 하나님의 법을 거역한 범죄자다.

모압에는 그모스(chemosh, 왕하3.27)라는 이름의 모압신이 있다(15).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모스를 따르겠다는 것 아닌가. 이방,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모압에 내려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그런 불경죄였다.

만약 성도가 교회 옆에 살다가 통도사 목탁소리가 들리는, 대문을 나서면 대웅전인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생각해 보라. 엘리멜렉이 이 경우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세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룻기는 불행한 사사기의 연속편이며 후속편이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던 시대의 부속품이다. 하나님을 떠나 잘 될 것이라 생각했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백주에 벌어진다. 이게 어찌 유다 베들레헴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일이랴.

 

 

부스러기

 

사실 엘리멜렉과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참담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늘 보았을 것이다. 사사시대의 흥망성쇠를 엘리멜렉 가족들 역시 직접 목도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뒤로하고 또 다시 이방 땅 모압’(Moab)으로 간다는 말인가?

왜 이스라엘이 실패했는가를 보고 있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를 읽어내지 못한, 아니면 그것마저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영적으로 바닥을 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잠깐 어렵다고, 여기 있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다른 곳에서 둥지를 준비해도 되는 걸까? 단순한 장소 이동만이 해법인가? 잠시 지금 불어오는 소나기만 피한다고 되는 일일까? 두통이 몇 달째 계속되는데도 아스피린으로 몇 시간씩만, 조금씩만, 지금 이 순간만 넘긴다고 되는 일이냐는 것이다. 이것이 룻기 초두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엘리멜렉은 한 가정의 가장이다. 동시에 영적으로는 대표다. 그것도 대대로 믿음을 이어온 명문가문 가운데도 명문인 유다지파이자 다윗의 가문이요, 그렇다면 메시야가 오시는 거룩한 계보에 든 영광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단지 풍요한 것에 의해,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서, 세상에 있다가도 없어지는, 내 손에 있을 때 내 것인 것이 재물인데도 그걸 지키고 유지하고 누리겠다고 하나님까지 버리고 세상 모압으로 옮겨 버린다.

이게 사사시대의 민낯이다. 잃었을 때, 실패했을 때, 넘어졌을 때, 병들었을 때, 고난 중일 때, 중요한 것들을 잃었을 때는 어쩌면 돌이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다시 무릎 꿇을 수 있다. 그런데 반대일 때... 성공할 때, 잘 될 때, 걱정 없을 때, 이런저런 것들로 풍족할 때가 문제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13.22)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룻기 역시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우리로 하여금 교훈을 얻게 하신다. 유다 베들레험은 흉년으로 곤고한 날을, 엘리멜렉은 풍족으로 형통한 날을 말이다. 사사시대는 이 두 그림이 묘하게 중첩(OL)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네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모압변주곡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생으로 어떤 답을 그려갈 것인가를 묻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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