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궤를 나에게로?(삼하 6.1-23)

20220927-28(묵상)

  

 

 

하나님의 궤를 나에게로?

삼하 6.1-23

 

 

 

    언약궤 이야기

 

    바알레유다 오벧에돔의 집(1-10): 두려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11):

    오벧에돔의 집 다윗성(12-23): 기쁨, 제사

  

 

언약궤 이야기

 

하나님의 궤가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 15.9, 18.14 참조)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져 있었다(1).

이 법궤(삼상7.1-2)가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수레에 싣고 이를 운반하던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6)자 갑작스럽게도 그만 웃사가 죽는 일이 발생한다(6-8). 그러자 다시 법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다시 머물러 있게 된다(9-11).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쓰라린 경험은 마침내 법궤를 메고 옮기는 율법대로 진행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12,13,15,17; 4.5-6 참조). 한편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17) 법궤, 곧 여호와의 궤를 두었다. 한편 법궤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들이 눈에 띈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 죽다.

다윗의 아내가 된 사울의 딸 미갈 비웃다.

다윗 분하여’(6) 두려워하여’(9) 즐겨하지 아니하’(10).

 

먼저,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다(3-4,6-8). 다윗 일행은 법궤를 수레에 싣는 것으로 이를 운반한다(4). 이것은 이미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고, 여기에 웃사는 법궤를 손으로 붙듦으로서 죽는다.

다른 한 사람은 사울의 딸 미갈이다(16,20-23). 그녀는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축제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즐거워 한 것을 마음과 언행으로 비난하고 업신여겼다(16,20). 이렇게 해서 미갈은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11)이 받은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제외되고, 예루살렘의 처첩들처럼 다윗에게 후계자를 낳아주는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23, 9.1 참조). 이렇듯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낮추어진 것이다(22). 미갈에게서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럴 만 한 신학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보다는 왕(왕비)의 체통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형식, 제도).

, 다른 누구보다도 다윗이다(1-2,9-10,12- ).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일에 인간적인 다윗이 숨어있다. 그러니까 다윗은 법궤를 옮기려는 생각을 할 때부터 인간적인 의도와 목적을 품고 있었다. 사무엘 기자는 이를 흘려보내지 않고 분명히 드러낸다:

 

    ①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9)

    ②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10a)

 

무엇인가. 처음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다윗의 심중은 법궤 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다윗 자신 중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법궤를 옮기는 일에 율법이 명한 말씀대로 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이 때문에 웃사가 결과적으로 죽는 일도 일어난 셈이다.

뜻 밖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1-11). 이때 다윗의 상태는 이렇게 드러난다: 분하여’(6) 두려워하여’(9) 즐겨하지 아니하고’(10) , 그렇다면 왜 이처럼 반응하는 것일까. 인간적인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그는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였을 것이다.

 

 

법궤, 오벳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다시 법궤를 옮기기까지 3개월이 자리한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11a) 그런데 결과적으로 3개월은 다윗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그러면 다윗은 첫 번 법궤 옮기기와 달리 두 번째 옮기기에는 어떤 변화가 보이는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보여진다. 두 차례에 걸친 이어지는 법궤 옮기기에는 특별한 차이가 드러난다.

 

첫째는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방식이다.

 

    ① 바알레유다 오벧에돔의 집(1-11): 새 수레에 싣고

        →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11): 3개월

    ② 오벧에돔의 집 예루살렘(12-15): 궤를 멘 사람들이

 

사실 사무엘상 6장에서도 수레에 싣고 옮겼었다. 그런데 이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문제가 되는가. 온 이스라엘은 첫 번째 옮기기()와 두 번째 옮기기() 사이에서 실패 이유를 후에 깨닫는다(대상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하나님은 어떤 일의 결과보다도 그것의 진행 과정의 적절성을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말씀대로의 순종에서 찾으신다.

그래서 이번에 다윗은 율법대로 법궤를 옮겨온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12b) 이처럼 다윗은 실패 이후를 다시 율법에 명한대로라는 옳은 길을 선택한다. 그 사이 3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앞서의 불신앙을 다 내려놓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순전한 마음을 회복한 상태에서, 심령이 가난한 예배자로, 하나님의 궤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둘째,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숨어있다.

 

    ①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9)

    ②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10a)

 

처음에 그는 여호와의 궤를 자신에게로 인도하려고 했다(①②).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지금 법궤 옮기기의 중심이 여호와의 법궤인가, 이를 옮기는 다윗인가. 첫 번째(1-11) 옮길 때에는 분명 중심이 다윗이었다. 옮기는 방법도 율법대로도 아니고, 옮기는 목적도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정치 권력이라는 군주요 왕의 권세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사이, 3개월 후에 다윗은 궤 앞에서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 이후에 보여준 다윗의 고백 하나가 이것이다(삼하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아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롤 보이시리라.” 놀라운 고백이자 바른 신앙이다.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망을 가는 길에 사독과 법궤를 되돌려 보내면서 자신이 궤에게 갈 것이라 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6장에서 사사로운 어떤 목적에 따라 법궤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시행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 같다. 바로 그때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 중심의 법궤(사울의 시각)에서 법궤 중심의 나(다윗의 시각)로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신앙은 어떤가. 내 필요와 사사로운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뭔가 일을 하는 그런 법궤인가. 돌아보아야 한다.

다윗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9-10절과 연결하여 법궤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10-12a). 법궤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울과 결코 다르다 할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일그러져가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그만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에서 점차 하나의 군주로 바뀌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신 중심이던 죄인에서, 이제는 자기 자신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종으로서 말이다. 이처럼 1차 법궤 옳기기 실패 사건은 다시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자로 회복하게 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셋째, 그럼에도 다윗은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그것은 제사장적인 모습의 다윗이다: 에봇(14), 번제와 화목제(17), 축복(18)

 

    ①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14b)

    ②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17b)

    ③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고”(18)

 

사실 다윗은 두 번째(오벧에돔의 집 예루살렘)로 법궤를 옮길 때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주도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12-16). 그는 오는 법궤를 맞이하는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그는 법궤를 메어 오는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제사장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다윗이다: 에봇(14), 번제와 화목제(17), 축복(18) 이것은 레위기(율법)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앞서 사울은 이러다가 끝났었다(삼상13.8-18, 15.1-15a). , 우리는 여기서 사울은 이때 폐위선언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사울은 사무엘상 13장에서 무늬만 제사장으로, 그래서 결국 자기가 원하는 승리와 왕권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제사(하나님)와 법궤까지도 자기 목적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울의 몰락을 가져왔다.

하지만 다윗은 어떤가. 그는 하나님의 것을 사사로이 자신의 것으로 탐하지 않았다. 물론 첫 번 법궤 옮기기는 분명 하나님의 진노가 시행될만큼 엉성했고, 그것은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불신앙이 그대로 드러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3개월이라는 시간 그 이후는 달랐다. 물론 그후에도 이처럼 제사장처럼 언행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중심은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자신의 영광과 권세로 탐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사울에게 법궤는 주술적인 힘을 주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보이는 법궤를 숭배하고 섬긴 것이 아니다. 보이는 법궤 그 자체가 어떤 주술적인 능력과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은 법궤를 사사로이 이용해 먹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3개월이라는 시간에 다윗이 완전하게 되고, 영화롭게 성숙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말하고 일하는 자로 자신을 세워간다. 다윗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 중심으로 자신을 드리고 있다. 실패와 넘어짐이라는 시간들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간 것이다.

똑같은 3개월이 다윗에게, 그리고 미갈에게도 주어진다. 그러나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춤을 추는 다윗의 신앙에 이르지 못했다.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과 그 안에 맡겨진 것들이 주어진다. 이를 다윗처럼 맡은 종이 있고, 이것을 미갈처럼 업신여기는 종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이 다르다. 저와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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