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겜은 가알을 낳는다(삿 9.34-45).

20211121b(묵상)

 

 

 

세겜은 가알을 낳는다.

Jdgs. 9.34-45

 

    본문 관찰

 

    아비멜렉의 진압과 가알의 추방(34-41)

    세겜성의 멸망(42-45)

  

 

에벳의 아들 가알

 

불행한 사람이다.

정말 그가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세겜이 행한 반() 하나님 행적들을 보았어야 했다. 가나안을 애굽처럼 만들었던 세겜의 불신앙을 보는 눈이 없었기에 그는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9.23)라는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역사, 그러나 분명히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볼 턱이 없었다.

그러나 몰랐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그의 불신 행위가 묵과될 수는 없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것이 지옥을 면제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안타까운 것은 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무지에서 살아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신이 지금 가알처럼 쓰이기 시작한 진행형 인생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니 용감하고 떳떳하게, 거기에다 자기 확신까지 겸비해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불행한 가알의 후예들을 만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

세겜이 아비멜렉을 배반한 일은 분명 우연(偶然)이 아니다. 똑같은 사건 속에서 요담처럼 쓰이는 사람이 있고, 가알처럼 쓰이는 사람이 있다. 가알은 세겜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임을 자청하며 혜성처럼 무대에 등장한다. 그런데 함량미달인 그에게 세겜 사람들이 모여든다. 언제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면, 지금 가알이나 아비멜렉이나 서로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이 비밀을 누설하면 안되지만 이 경우는 서로 공멸(攻滅)하는 자살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뜻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들이 선택하는 경우의 수이다. 불행한 사람들과 세겜을 보면서, 하나님은 선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지만 그러나 악() 역시 하나님의 무풍지대(無風地帶)가 아님을 명심하게 된다.

그런데 또 희한한 일이 발생한다. 바로 눈앞에 아비멜렉과 그 군사들이 가알과 세겜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는데도(34-37) 대항할 시기를 놓치고서 싸우다가 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40) 쫓겨난 신세로 전락하고서 세겜에 거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세겜이 가알이라는 악을 제거했으니 거룩해 졌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죄가 죄로 더불어 싸웠는데 거기에 거룩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의를 가장한 죄가 또 다른 죄와 싸운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재중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의 정체다. 교회에 이런 일이 없으라는 법 없고, 내 안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 없으니,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사람이 거룩을 떠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아가는 복있는 사람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충분히 이처럼 살 수 있다. 의와 거룩을 가장한 또 다른 이름의 죄가 그럴듯하게 행세하고 있는 모습, 지금이라고 없으란 법 없다.

   

 

세겜의 말로(末路)

 

세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다. 자기들이 세운 왕 아비멜렉, 그런데 그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42-45).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9.24) 그들의 죄를 갚으셨다. 하나님은 악(아비멜렉)으로 하여금 또 하나의 가시나무인 악(가알)과 악(세겜)을 제거하신다. 이것이 아비멜렉과 가알, 그리고 세겜의 비극이다.

,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면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찬송가 5211) 세상은 요지경이다. 목사로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이러한 악과 그 악을 위해 쓰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목격할 때이다. 나는 또 어떤가? 잘 가고 있나? 나는 이 불행한 사람들처럼 살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가?

선이라는 이름으로 악과 악이 싸울 때, 만약 이런 일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 자행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너무 본문을 대립 구조로 끌고 가지는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리고 자신들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신앙공동체 안에도 아비멜렉과 가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사는 것을 사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극이다. 서로 망하는 것이다. 왜 이처럼 불행한 자로 자신을 드리는 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짧은 나그네 인생길인데 아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세겜은 하나의 공동체다. 오늘로 말하면 지역 교회쯤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있고, 물론 사사가 부재중인 상태이기는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다. 하지만 이들의 수준은 철저하게 죄 가운데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이스라엘인 역설이 현재 이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로 적용을 해도 별 하자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세겜 교회를 이처럼 만들었는가? 무엇이 세겜 교회출신인 아비멜렉과 가알이라는 이름의 성도를 이처럼 만들었는가? (). 세겜은 지금 심는대로 가두고 있다. 죄는 이렇게 무섭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 없이 일하고, 영적 질서를 무시하고, 영적 리더쉽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것은 이와같은 영적 무질서영적 황무함’, ‘영적 무지에 따른 영적 무정부 상태. 이것이 사사기 교회가 휘청거리는 이유들이다. 교회가 아비멜렉과 가알같은 사람들에게 리더쉽을 허용했을 때, 아니 거룩한 영적 지도력과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세우사 교회를 목회하도록 하신 영적 리더쉽이 인정되지 않게 될 때, 그래서 아비멜렉과 가알같은 사람들에게 영적 리더쉽이 넘어가 있을 때 그 공동체의 운명은 뻔하다.

아비멜렉은 자기 의도와 뜻대로 모든 것이 너무도 잘 되니까 무서운 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가나안을 애굽처럼 만들어간다.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화살이다. 이 화살 끝이 과연 어디에 명중될지, 두렵고 떨림으로 본문 앞에 서 있다. 자신을 하나님과 말씀 앞에 점검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에 실패하면 인생은 내가복음으로 무장하여 사망의 절벽을 향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살아가는 당당한 사람들이 불쌍할 뿐이다.

사실 어떤 일(자리)에 쓰임 받는다고 해서 좋아할 일이 아니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쓰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비멜렉처럼, 가알처럼, 세겜처럼 쓰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들처럼 쓰이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엄존하고 있다. 참으로 비극이지만 이들의 말로를 착잡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인생을 정확하게 진단하시며, 결국은 당신의 일을 진행해 가시는 것을 본다.

가나안(교회)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이 성취되어야 할 곳이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얻은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다. ,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이 비극을 어떻게 반전(反轉)시키시며 마침내 하나님의 이야기로 회복해 가실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씀 앞에 서 본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다시 그 희망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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