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낫세 55년, 아몬 2년(대하 33.1-25)

20201215(묵상)

   

 

 

므낫세 55년, 아몬 2

2 Chr. 33.1-25

  

    본문 관찰

 

    므낫세(1-20, 55) - 포로기의 한 모델(model)

      A. ()_우상숭배(1-9): “악을 행한 것이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9)

      B. ()_심판(10-11):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바벨론)

      C. ()_회개(12):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D. ()_바벨론과 개혁(13-20): ‘그 후에’(14a)

    아몬(21-25) - 파국 2

   

 

반전 55, 파국 2

 

므낫세 또한 솔로몬의 성전 기도의 섭리 위에 서 있다(7.14).

하지만 그의 통치 55년은 유다라 할 수 없을 만큼 북왕국 이스라엘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12세에 왕이 될 때까지 아버지 히스기야와 그의 하나님을 경험했을 텐데 정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므낫세(1-20): 12+ 55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13)

        → 그 후에’(14a)

 

아버지 히스기야가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은 시한부라는 것을 므낫세도 몰랐을 리 없다. 자신이 한 살 한 살 자라가는 것과 아버지의 생명이 한 해 한 해 줄어드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과 죄에 대한 단호함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므낫세 또한 아버지를 통해 보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아버지와 정 반대의 길을 자처한다. 패역이고 패륜이고 그래서 패망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한 우상숭배 종합세트(2-7a)라는 죄악은 므낫세(2,6,b)와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9a)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악을 많이 행했는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9b). 이때 하나님께서 돌이키고 회개할 말씀을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10a)였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므낫세는 여호와께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11) 간다. 심판이다.

잃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을까. 명색이 유다의 왕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환난을 당하자 마침내 겸손의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린다(12). 기도 이후가 아름답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13) 하나님의 뺄셈은 여기서도 그 빛을 발한다. 때문에 환난’(고난)은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마침내 그 후에’(14a)가 빛난다. 앞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행한 우상숭배 종합세트(2-7a)라는 죄악이 다 제거된다. 므낫세의 명령을 보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16b) 늦은 감이 많지만 그럼에도 겸손하기 전’(19b)의 우상숭배 창고(2-7a)를 기도와 크게 겸손하기 후’(12-13)에 이를 완전히 버린다. 이것은 비록 므낫세가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을지라도 그럼에도 겸손하게 회개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준다.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으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황(, 형편)은 없다. 단지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을 뿐이다.

 

 

아몬(21-25): 22+ 2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그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23-24)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죽고 죽이는 처참한 역사가 남왕국 유다에서도 반복된다. 이것이 다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여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의 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아몬은 불과 24세에 절명하는데 그게 다름 아닌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24)는 반역이고, 그 반역자들 역시 유다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살인의 악순환이다. 비극이다. 그가 2년짜리로 써 낸 초라하고 볼품없는 불행한 인생보고서를 보며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자신은 물론이지만 겨우 8세에 그의 뒤를 잇는 어린 아들 요시야를 볼 때 더 그렇다. 22년 동안이나 아버지 므낫세를 보며 자란 아몬이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버지 아몬을 보고 자란 요시야나 다를 바 없을 것 같아서다. 여기까지는 표면적인 사실을 보며 추측해 보는 부분이다. 그만큼 유다의 역사는 암울하고 참담하다. 과연 이렇게 흘러감에도 다윗언약(삼하 7)은 유효할 것인가.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서 이미 삐거덕거리는 중이다. 그만큼 죄가 무섭고 아픈 것이라는 뜻이다. 그걸 모르니 므낫세나 아몬처럼 날뛰는 것 아니겠는가.

   

 

부스러기 묵상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4)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아름을 영원히 둘지라.

    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내가 명령한 일들

    곧 모세를 통하여 전한 모든 율법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7b-8)

 

하나님은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말씀하셨다.

역대기 기자는 그 가운데 핵심 말씀(4,7b-8)을 통해 므낫세의 죄악을 고발한다. 감히 이럴 수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유다의 다윗왕조를 잇는 왕가(王家)의 후예가 아닌가. 그럼에도 성전과 율법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무시하고 성전 쪽으로, 율법 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해 간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그것도 여호와의 성전에 이방의 가증한 인조신(人造神)을 만들어 버젓이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을 범하고서도 유다의 왕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렇듯 성전언약(4,7b-8)은 유효하다. 하지만 그 죄악에 대한 값은 지불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심판은 피할 수 없다. 그게 아프다. 소를 잃고 나서야, 그러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므낫세가 그제서야”(13b) 정신을 차린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인가. 고칠 외양간(유다, 왕으로서의 청지기직)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겸손하기 전에’(19) - 산당과 우상을 세우다.

      ∙환난’(12a) - 바벨론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12b-13a) -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다.

 

늘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선하고 아름답다. 환난을 절묘하고도 신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에게서 이 사실은 좀 더 분명해진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 때를 겸손하기 전이라 말씀하신다. 겸손이 이처럼 그려진다는 게 조금은 새롭다. 그렇다면 우상숭배는 교만이라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고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환난이다. 그렇다면 환난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님은 유다의 열왕들의 역사에서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할 때에 이런저런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을 들어 저들의 문제에 개입해 들어오신다. 그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환난이고 고난이고 고통이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악하고 죄로 가득한 므낫세도 자신에게 밀어닥친 환난 앞에 하나님을 찾는 돌아온 탕자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환난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수 있는 겸손의 복이 임하는 기회다. 상황과 형편은 그대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읽어내고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시각이 바뀌면 환난마저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듯 므낫세에게서도 배울 수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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