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담과 아하스: ‘북왕국변주곡’인가(대하 27.1-28.27)

20201206-07(묵상)

   

 

 

요담과 아하스: 북왕국변주곡인가.

2 Chr. 27.1-28.27

  

   본문 관찰

 

   요담(27.1-9)

   아하스(28.1-27)

      북왕국바라기(1-15): 하나님을 버리다.

      앗수르(16-21): 하나님도 버리다.

      우상숭배(22-27)

   

 

북왕국바라기

 

요담은 아버지의 비참한 마무리를 보아서 그런지 정직한 왕으로 평가되도록 언행한다.

하지만 아하스가 다스리는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되어버렸다(1-4). 이어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이를 어찌해 보려는 아하스의 불신앙행진곡이 언제나 엇박자다. 그러니 이에 춤을 추는 유다의 몰골이 꼴사납기 그지 없다.

 

 

요담(27.1-9)

 

나병이 든 아버지 웃시야의 별궁생활에 따른 섭정(26.21)에 이어, 마침내 25세에 왕위에 오른다. 과연 어떤 왕이 될 것인가.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다(2a,6).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큰 교훈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유다는 여전히 부패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2b). 아마도 이 흐름은 지난 왕들의 일탈의 연속이 가져다 준 부정적 영향이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던 요아스(24.18), “세일(에돔)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아마샤(25.14),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웃시야(26.16)로 이어지는 우상숭배의 흑역사라는 악영향이 유다의 영적 침체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여기에 요담은 하나님과 성전(율법)에 소극적이면서 크게 죄를 더하지만 하지 않는 선에서 바른 길을 걸었고, 이에 나라는 점점 강하여졌다(6).

보이는 성벽 재건(증축), 여러 성읍들 건측, 견고한 망대 건축, 암몬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한 나라 곳간의 풍요 등은 이루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하였다는 점이 주는 아쉬움을 매우 크다.

   

 

아하스(28.1-27)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1b)

 

급기야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되어버렸다(1-4). 다시 유다는 북왕국 멜로디를 돌림노래처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다(5-15). 왜 그런가: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6a)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가. 그게 2-4절이다. 마치 옛날 이곳이 포도원이었을 것이라는 흔적만 남은 곳처럼 유다는 북왕국바리기로 완전히 옷을 갈아입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아람연합군(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에 의해 수 십 만의 유다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포로가 되어 끌려간다. 흥미로운 것은, 한편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오뎃이 유다를 포로로 잡아오는 이스라엘에게 저희를 되돌리라는 메시지(9-11)를 전하는데, 이것은 남왕국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선지자가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바, 유다의 영적(靈的) 현실이 얼마나 암담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오히려 북왕국은 하나님의 선지자도 있고, 또한 그의 설교를 아멘으로 화답도 한다(13):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못하리라. 너희가 행하는 일이 우리를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입박하였으니라.” 그런 후 포로를 다시 유다로 돌린다.

북왕국이 오리려 유다 같다. 이는 아하스가 앗수르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하스는 에돔과 블레셋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다(16). 하지만 파병은 하였으나 오히려 조롱을 받았고(20-21), 이에 오히려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22) 하나님을 떠난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23) 그는 더 하나님을 멀리 떠난다. 다메섹 신들을 섬기고, 성전 기구들을 파괴하고, 성전문을 닫고, 산당을 세워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다(24-25). 참으로 패역한 왕이 아닐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22)

 

곤고할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도 될까 말까 아니겠는가.

그런데 더욱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다. 이러고도 다윗의 후손이자 유다왕조(다윗왕조)의 후예라 할 수 있겠는가. 유다는 이렇듯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북왕국바라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유다에는 선지자도 없는 것일까. 오뎃이라는 북왕국 선지자의 메시지와 이 메시지를 순종해 내는 북왕국의 백성들의 모습이 참 어색하지만, 이것이 북왕국이다(9-15). 그러니 유다는 더 처참하고 참담하게 무너진 비참하고 비통한 모습이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세월이 무려 16년이다(1). 그럼에도 하나님은 20만명이라는 유다 포로를 다시 고향 예루살렘으로 되돌리신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어느 왕보다 더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유다를 가득 덮으신다. 그럼에도 아하스는 더 멀리멀리 하나님을 떠난다. 이번에는 앗수르를 의지한다(16). 하지만 도리어 앗수르의 공격을 받을 뿐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이란 말인가.

정말 기절할만큼 놀랍고, 그래서 놀람을 넘어 감동의 신음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 아하스에게서 히스기야가 이어지고 있음이다(27). 하나님은 다윗언약과 이어 따른 다윗왕조(유다왕조)의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 죄악의 어둠이 가장 깊을 때 사랑과 은혜의 밝은 빛을 비추신다. 전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하스는 하나님 밖 가장 저 끝으로 죄행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끝에서 은혜로 그의 죄와 허물을 덮으신다. 이 으혜 때문에 오늘 내가 있는 것 아닌가. 갚을 길 없는 이 은혜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내 안에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찬미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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