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 빛과 그림자, 그 공존(대하 26.1-23)

20201205(묵상)

   

 

 

웃시야: 빛과 그림자, 그 공존

2 Chr. 26.1-23

  

   본문 관찰

 

   형통의 빛(1-15): 하나님을 찾다.

      선지자 스가랴

   몰락의 그림자(16-23): 마음이 교만하여지다.

      제사장 아사랴

      선지자 이사야

 

 

두 얼굴의 왕이로소이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을 다스린다.

하지만 그의 통치 후반은 나병환자가 되었고, 죽는 날까지 별궁에서 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게 왜 나병이 생겼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가 웃시야의 생애를 둘로 나누어지게 한다. 그 역시 아버지 아마샤처럼 영광과 몰락이라는 쌍곡선을 따라 결국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모든 게 그렇지만 전반전의 승리는 후반전에 지켜지지 않으면 무용하다. 반대로 전반전의 실수(실패, 패배)는 후반전에 얼마든 만회(회복, 역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전후반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어찌보면 큰 의미는 없다. 과정을 포함해 결국 마무리가 어찌되느냐가 핵심이다. 어느 쪽이든 그 안에 든 실패는 아픈 법이다. 비록 성공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실패의 시간 안에 든 아픔과 눈물과 절망은 없어지지 않는다.

   

 

형통의 빛(1-15): 하나님을 찾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4b-5)

 

웃시야에게는 선지자 스가랴(5), 제사장 아라랴(17-20), 그리고 이사야(22) 선지자라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는 영적 거장들이 있었다. 웃시야가 왕으로 기름 부름을 받은 그의 나이 16세를 전후한 시기는 그의 아버지 아마샤가 하나님을 떠난, 그래서 유다는 다시 폭풍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그런 때였다. 그런 시기에 영적 멘토들이 웃시야 곁에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자 기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웃시야는 아버지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보았고 또 알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선지자들과의 동행은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하나님을 구하는 형통한 날에는 블레셋과 암몬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6-8), 건축과 농업(9-10)은 물론 군사강국을 이룬다(11-15). 염려는 수면 아래로 잠기고,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기이한 도움을 얻어 강성하여짐”(7a,15b)으로 나라는 탄탄대로를 구가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고 전심으로 따를 때 형통과 부요와 평안의 복을 더하신다.

   

 

몰락의 그림자(16-23): 마음이 교만하여지다.

 

   “교만은 폐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량하려 한지라.”(16)

  

하지만 강성해지자 교만하여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함으로써 문둥병에 걸려 죽는다(16-23):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16) 무너지는 때가 고난일 때가 아니다. 강성할 때다. 그것도 인간의 자아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교만이다. 이렇듯 교만은 형통을 무너뜨리는 고질병이다. 왜 이처럼 대부분은 잘 될 때 무너질까. 그는 초대왕 사울처럼 제사장의 임무를 침해하고서 왕도를 넘어선다. 그 결과 그는 죽을 때까지 성전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쓸쓸하게 별궁에서 나병과 싸우다 죽는다.

한편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분향하는 임무를 웃시야 왕이 하겠다고 성전에 들어온다(16-18). 이때 제사장은 왕 앞이라 할지라도 율법의 규례를 그대로 설교한다: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18b) 이때 여기서 멈추었어야 한다. 하지만 웃시야는 자신의 언행이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죄인 것을 알고도 선을 넘는다(19). 이는 제사장을 우습게 생각한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또한 하나님께 교만한 범죄 행위다.

그 결과 이마에 나병이 생긴다(20). 죄의 값이다. 시작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정직이었으나 그 끝은 교만과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강성함의 복을 허망하게 날려 버리고 만다.

   

 

부스러기 묵상

 

   “웃시야 왕이 죽던 해가 내가 본즉 ”(6.1)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21)

 

16세에 왕위에 올라 무려 52년을 다스린다.

하지만 그의 통치 후반에 제사장의 권한을 침해함으로 나병에 걸려 별궁에 살았다. 그 기간에 아들 요담이 아버지의 교지를 받아 대리통치로 얼마간을 지냈을 것이다(21b). 그가 다스리는 시기에 해당되는 이사야 1-6장의 유다는 영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영적 암흑기였다. 이 모든 것이 다윗왕조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이 웃시야에게는 강성해진 통치 전성기에 일어난 점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깃털 같은 것을 가지고 교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을 인간의 공로로 빼앗는 것이어서다. 유다 왕들 가운데 통치 기간이 52년이라면 가장 장수의 복은 물론 왕의 통치로서도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년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교만의 사인(sign)과도 같은 나병에 걸림으로 여호와의 전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별궁에서 외롭게 투병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아마 그는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21a) 그렇게 눈을 감는다.

형통(강성)과 교만(범죄)은 양다리 걸치듯 살아도 되는 것으로 동시에 허락된 게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복이고, 또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인지 안다. 그럼에도 교만함으로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곤 한다. 어리석고 한심한 언행이지만 죄바라기는 언제나 우리네 삶을 겨냥한다.

모든 게임(경기)에서 그렇듯 점수()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잃지 않는 것도 얻는 것만큼 중요하다. 경기(게임)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가까울수록 더 그렇다. 이제 한 번 넘어지고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시간이나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이 쉬운 건 없다. 하나님 앞을 살아가는 인생행로는 더 그렇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성도의 삶인 것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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