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3]: 하나님의 진노를 몰랐을까?(대하 18.28-19.11)

20201123-24(묵상)

   

 

 

여호사밧[3]: 하나님의 진노를 몰랐을까?

2 Chr. 18.28-19.11

  

   본문 관찰

 

   하나님의 진노(18.28-34): 한 사람이 쏜 단 하나의 화살

   선견자 예후(19.1-3): ‘그러므로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19.4-11): 여호와를 경외하라!

   

 

아합 vs 여호사밧

 

참과 거짓이 한판승부를 벌였다(18.4-27).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 거짓의 편인 아합의 전사가 예고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일어나고,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쟁에 유다 여호사밧이 그대로 출전한다(18.28). 결국 아합은 죽으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고, 죽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자 진노하심이다. 하지만 선견자 예후는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여호사밧에게 이중 메시지를 전한다(19.2-3): 그러므로 그러나 여호사밧은 죽을 고비를 하나님의 은혜로 넘긴 이후, 불행 중 다행스럽게 19장에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

 

 

하나님의 진노(18.28-34)

선견자 예후(19.1-3)

 

아합은 변복을 하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전쟁에 출정한다(18.29). 그리고 아람왕은 이스라엘 아합과만 싸우라고 전갈을 내린다(18.30). 이에 한 군사가 무심코 쏜, 그러니까 조준하고 쏜 게 아니라 우연히 쏘아올린 단 하나의 화살이 이스라엘 아합왕의 갑옷 솔기(봉합선)를 뚫고 들어가 박히는 중상을 입는다. 하지만 전쟁은 맹렬하였기에 아합은 그만 병거에서 피를 흘리다가 저녁 해가 질 즈음에 전사하고 만다(18.33-34). 이는 이미 예고된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다(18.18-22).

한편 여호사밧은 아람의 지휘관과의 결투에서 그만 죽을 위기에 처했고, 그런데 이때 그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경험한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18.31b) 지휘관은 그가 아합이 아닌 것을 보았기에 추격을 멈춘 것이다(18.32). 이렇게 해 여호사밧은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귀궁할 수 있었다(19.1)

이때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19.2-3) 여호사밧은 하나님 편에 선, 다윗의 길을 걷는 왕이다. 그럼에도 북왕국과 동맹을 맺는 등 죄의 길을 도모했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긍휼과 은혜를 입음으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랬으니 예후의 메시지를 순종으로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회복(19.4-11)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나,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아람전쟁에 아합과의 동맹을 통해 출정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여호사밧은 예후의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낸 후에 더욱 하나님 쪽으로 걷는다. 이것이 이어지는 그의 개혁이다(19.4- ).

이에 그는 온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유다 백성들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19.4). 멋진 일이다. 그리고 먼저 유다 온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는 국가의 사법체계를 정비한다(19.5-7). 무엇보다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불의나 치우침이나 뇌물이 판결을 굽게 하지 못하도록 공명정대한 재판을 당부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재판(재판관)은 율법(종교)에 속한 분쟁과 일반 행정에 해당하는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한다(19.8-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사(재판)가 단지 시시비비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는 죄, 곧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이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공의)이 흐르게 되기를 요구한다. 이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실한 개혁이다.

   

 

부스러기 묵상

 

여호사밧 아람전쟁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는 북왕국과의 화친정책을 통해 자칫 아합의 꾀에 밀려들어갔다. 그로 말미암아 결국 악한 자들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19.2a) 그릇된 길로 밀어날 뻔하였다. 이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이를 누구보다 여호사밧이 잘 알고 있고(18.31), 또한 이 일의 끝자락에서 선견자 예후를 통해 받은 메시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낸다(19.1-3).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왕정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 이게 맞고 옳다. 무릇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는 이처럼 살아야 한다. 배은망덕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누구나 한번쯤 하나님과 각을 세우며 자행자지할 때가 있다. 자기 잘난 맛에 그만 휘청거리는 것인 줄도 모른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때까지, 갈 수 있는 곳까지, 할 수 있다 싶은 일까지 밀고 나간다. 그러다가 대부분은 최후를 맞고 거기서 그만 다시 돌이킬 수 없이 끝을 내고야 만다.

그래서 여호사밧의 돌아섬과, 이어지는 인생이 있음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그러므로만으로 끝내셔도 할 말이 없다(19.2b). 그런데 그러나로 기가 막힌 새노래를 잇게 하신다(19.3).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여호사밧이고 우리네 인생길인 것을 다시금 묵상의 창에 걸어본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 주께 올려드리는 보고서는 우리 실력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러나로 잇게 해 주셨기에 여호사밧의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19.4- ). 이 어찌 그만의 인생이겠는가. 그러니 자랑할 것도, 자만할 것도, 자고할 것도, 자신할 것도 아님을 지금 살아가는 보너스 인생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겸손한 흔적을 맛볼 수 있다.

살아갈수록 쌓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물론 우리의 못남과 허물이라는 죄가 쌓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덮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한 게 아닌데 잘했다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높여주신다.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가면서 그러니 더 충성하고, 사랑하고, 온 맘 다해 섬기며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다. 무엇 하나 버릴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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