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만들기: ‘준비하라’(삼상 16.1-23)

20220602(묵상)

  

 

 

다윗 만들기: 준비하라

1 Sam. 16.1-23

 

 

    본문 관찰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1-13).

       사람 - 외모(1-6)

       여호와 - 중심(7)

       하나님의 선택(8-13)

    사울 vs 다윗의 전초전이 시작되다(14-23).

  

 

다윗 프로젝트

 

사울의 슬픈 서사시를 보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사울은 사무엘상 9장에서 왕으로 선택되어(17), 10장에서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다(1,24). 그런데 13장에서 망령된 제사를 드림으로 범죄하고(8-12), 14장에서 가서야 첫 제사(35)를 드린다. 그러니까 왕이 된 지 2년이(삼상13.1- ) 훨씬 지난 후에 드린 제사다. 이것은 삼상 97절에서의 태도와 그 사이의 기간이 너무 길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신앙마저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너무 일찍 피어버린 꽃과 같았다. 다시 말하면, 3라운드짜리 아마추어 선수로는 손색이 없었으나, 냉혹한 사각의 링 안에서 벌어지는 12라운드 승부의 프로 세계에서는 3라운드부터 소나기 펀치를 허용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라운드는 거의 경기를 포기할 정도가 되었고 길보아산 바닥에 완전히 벌렁 누어 버렸다. 그는 역전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허공을 향해 펀치를 날리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휘청거렸다.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과의 타이틀 매치에서 보여주던 파괴력 넘치는 펀치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관중(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망했고, 프로모터(Promoter)이신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을 선수라고 인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사울의 파탄(파멸, 자멸, 파국)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사울이 추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예배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삼상13.8-14). 이것이 결정적이다. 사실 성도의 생활이란 예배의 생활이다. 예배 없는 교회(성도)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찾아오시며, 교훈 하시며, 격려하시며, 깨닫게 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예배는 종합예술이다.”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 예배에는 찬양, 기도, 경배, 회개, 말씀, 은혜, 결단, 감사, 평강 등등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삶의 전 영역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배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상태)-언제나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의 비례한다.

 

(2) 성령을 소멸했기 때문이다. 한 때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으로 보고서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삼상10.9-13)는 속담이 될 정도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3) 불순종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함으로(삼상13.13-14), 또한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삼상15.19,22-23,26).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後悔)하시는 심정을 말씀하실 때에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4) 백성을 두려워했다(삼상15.9,15,21):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4) 이것은 한마디로 회생불능(回生不能)이다.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몰락해 가는 사울의 비참한 고백을 보라: “내가 범죄했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삼상15.30)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렸어야 했던 사울, 그러나 사무엘을 의지하여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몰골을 보라: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삼상15.27)

 

 

1. 하나님: 사울 다윗

 

이것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사(삼상15.11,35), 그를 버리시고(삼상15.23), 급기야 여호와의 신이 떠남’(삼상16.14)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1) 사울은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였으나(삼상10.6-7,9-10, 11.6),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기 시작한다(삼상16.14). 사울은 성령 안에서 범죄했다. 그가 하나님과 왕권을 바꾸자, 하나님은 성령을 악령으로 바꾸셨다. 왜냐? 영적 무지, 혹은 초보신앙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리고”(1)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사울은 의 자리에 있지만 이미그는 끝난 사람이다. 그의 가지는 이제 더 이상 축복과 은총을 향하여 자라는 것이 중지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더 이상 생명수가 공급되지 않았다. 그것은 물이 마른 것이 아니라, 사울의 뿌리가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은 것이다(1.15). 그렇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6.23).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지도자가 있을 수 있다. 본문 이후로 사울이 죽기까지는(삼상31.6) 마치 다 된 건전지가 들어있는 장난감처럼, 늘어난 tape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펑크 난 자동차처럼, 럭비공처럼 예측 불가능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2.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모습에서 이에 대한 몇 가지 영적 원리들을 확인하게 된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같은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훗날 불행하게도 사울은 이 기준에서 탈락하고 만다: “여호와께서 왕(사울)에게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다윗)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13.14)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사무엘을 향한 이 간략한 나무람 속에는 기나긴 오도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사실상 용모와 신장이라는 가치(평가) 기준은 이스라엘의 전매특허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사울에게서 실패가 증명되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실수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울과 다윗이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들이었을지라도(삼상9:2, 16:2) 외적인 조건을 따라 쓰임 받은 것은 아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그렇다면 누가 쓰이느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다(삼상10.20-24, 16.11-13).

 

(2)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다(삼상9.3-4, 16.11). 하나님은 이처럼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부르셔서 쓰셨다.

*사울 / 아버지 기스가 잃은 암나귀를 찾아 온 이스라엘을 두루 다닌다.

*다윗 /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삼상16.11b)

 

(3) 겸손한 사람이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9.21, 15.17) 겸손은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특별히 자기 가능성을 신뢰하는 젊은이들일수록 이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에서 실패하는 경향이 많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겸손을 말하고 있다: “젊은 자들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4)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한 사람이다. 외적 표징(Sign)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삼상10.1, 16.13), 내적으로 성령이 임하신다(삼상10.6,10, 16.13).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쓰신다(3.3).

 

(5)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삼상15.22-23). 사울은 하나님이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버림받는다(삼상13.13-14).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後悔)하시는 심정을 말씀하실 때에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15.11)

 

 

3. 다윗은 하나님의 예선(豫選)을 사무엘과 함께 멋지게 통과한다.

 

그러나 그 예선은 먼저 다윗에게 통보되고 난 이후에, 그러니까 일정 기간을 연습하는 기회가 주어진 다음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미다윗을 주목하여 보고 계셨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아직다윗에게 통보되지 않았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윗에게 기름 붓는 행위 그 자체는 비밀에 싸여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차기 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무엘이 이러한 사실을 공포한 흔적을 찾지 못한다.

 

(1) 예선전의 기준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예선전의 심판으로 기용하신다. 그 기준은 사무엘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기준이었다.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豫選)하였음이니라.”(1)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3)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

 

(2) 먼저 그렇다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이전의 다윗의 생애를 조명해 보자. 이것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쓰실 사람을 훈련시키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은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11)는 한 문장에 다윗의 전부가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인 자질을 계발하고 계실 때, 다윗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다윗의 오늘은 가장 정직한 어제다. 이것이 다윗의 양치기로서의 무명 시절을 가장 잘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오늘은 그냥 우연히 주어지거나,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따라서 어제(과거)가 모여 오늘(현재)이 되고, 그 오늘(현재)이 모여 내일(미래)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독한 양치기였다. 그는 홀로 모든 일들을 해결해 가야만 했다. 그는 혼자였다. 단지 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직 자기와의 싸움만이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일대일 양육을 보이지 않게 계속하셨다. 그는 이 무명 시절을 단지 소일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외적 환경은 고독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는 열악한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고 그것을 지배(정복)했다. 물맷돌을 던지는 훈련, 수금을 잘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했다(18) 우리는 여기서 광야의 세례 요한을 머리에 떠올린다. 하나님은 준비한 자를 들어 쓰신다.

외로운 양치기였다. 생각해 보라. 사무엘이 조그마한 성읍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그것도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온 발걸음이 아니었다. 사무엘은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1) 왔다. 이것은 평범한 행차가 아니었다. 이새와 그 아들들은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함받는다(5). 그러나 8(형들) vs 1(다윗)의 경쟁률이라는 예선전(10)이 시작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형들은 한결같이 어쩌면 대단한 행운이 자기 몫이 될지도 모른다는 -특별히 장남 엘리압은 거의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을 것이다.- 흥분을 억누르고 예선전 출전(?)을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도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지키기 위해서(11) 들판에 있었다. 그러나 비천한 곳에서도,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들 앞에서도 다윗은 여전히 성실하게 행동하였다.

아버지 이새에게마저 주목 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그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했으나”(5), 어찌된 일인지 이새는 다윗에게는 공평한 찾아 온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숨막히는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다윗은 조용한 이름 없는 푸른 풀밭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이었다. 바로 이점이 소위 아버지의 딜레마.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받는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소개된 <양과 염소의 비유> 가운데 염소 쪽 사람들이 감히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기준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하게 된다. 묻노라! 당신은 누구를 주목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가까운 것인가?

시대와 세상은 누구에게 열려있는가? 사람에게 주목받고 있는 자가 아닐 것이다. 마치 세례 요한처럼 빈들에서 묵묵히 아름다운 정상을 준비하는 자의 몫일 것이다. 정상은 언제나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사람이 올라가서 차지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친히 비워 놓으셨다.

온상(溫床) 속에서 자란 자생력 없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 그대로 노출된 사람이었다: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삼상17.34-35)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삼상17.37)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살았다. 그는 오늘의 호흡까지라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몸으로 고백하며 간증한다. 그랬기 때문에 형들과 함께 예선전에 출전할 기회가 박탈되었던 그날도 여전히 양치는 목동으로 최선을 다 했으며, 그의 입술과 행동에 그 어떤 불평과 불만도 없었다. 그렇다. 형들은 예선전부터 시작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예선전에는 아끼시고 바로 결승전으로 올리신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고백을 떠 올린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비록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지나쳤을지라도 -아마 일곱째 아들은 여섯 째까지 사무엘의 고개가 좌우로 돌려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 하나님은 그를 지나치지 않았다.

 

(3) 여기 아삽과 사도 베드로의 선포에 귀 기울이자! 먼저, 아삽의 시편을 보라.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시고, 다윗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르고 지도하였다고 찬양한다: (하나님께서)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끌어 내사 그 백성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완전함으로 지도하였도다.”(78.70-72)

이어서, 사도 베드로의 선포를 보라. 다윗도 소년(젊은)이었다(삼상17.33):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로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5-10)

 

 

4. 사울 vs 다윗의 전초전(14-23)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된 자와 여호와의 신이 떠난 자와의 대조적인 관계에서부터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파란만장한 10여 년의 쫓고 쫓기는 쟁탈전이 시작된다. 그런데 서로가 너무 상이한 방법과 태도로 이 일을 벌여 나간다. 성경은 극적인 대조를 통해 기우는 사람과 세워지는 이 두 사람을 생동감 있게 소개해 준다.

 

(1) ‘여호와의 부르신 악신이 사울에게 임했다(14,16,23). 그는 버림받았다. 그래서 번뇌하게 되었다(14,15).

 

(2) 다윗은 궁중에서 왕위 수업을 받게 된다(17- ).

 

 

부스러기 묵상

 

누가 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으로 역사 앞에 등장하게 되는가?

본문은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사울이 여전히 왕이다. 그는 이후에도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스라엘 왕으로 있었다. 그렇다. 다윗은 이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준비되는 또 다른 험악한 세월을 맞이한다.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다윗은 오늘도 양치는 언덕으로 나아간다: 그는 양치는 사람이었고(삼상16.19),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치는”(삼상17.15)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뻐기지도 않았다.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는 큰나무요 큰그릇이었다. 그는 오로지 언젠가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기까지 묵묵히 뿌리를 깊이깊이 내렸다. 앞으로 닥칠 숫한 비바람에 견디기 위해서 그는 오직 자신을 준비하는 것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했다.

 

(1) 성령께 붙잡힌 사람이다(1.8, 삼상16.14). 영적 침체, 영적 무기력, 교만, 거짓 영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라! 주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

 

(2) 처음부터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무명이요,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그를 주목(준비)하신다(고전1.26-31). 그는 소년의 때에 부르심을 받는다(삼상17.33). 하나님은 수 십 년을 내다 보시고 다윗이 소년이었을 때 그를 미리 준비하셨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무엘이 그러했고(삼상1.11,20,24-28, 2.18, 3.19-21), 세례 요한이 그러했다(1.13-17).

 

(3) 사람과 하나님의 기준(시각)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다(고후1.22). 비록 사람의 첫인상(외모)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목숨 걸지 말라! 이 세상의 기준이 온통 외모(보이는 것, 시각적인 것)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신뢰할 만한 척도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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