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요셉의 아들들: 기업 분배의 두 얼굴(수 16.1-17.18)

20210912(양무리교회)

 

 

 

요셉의 아들들: 기업 분배의 두 얼굴

Josh. 16.1-17.18

 

    본문 관찰

 

    에브라임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지역은 이러하니라(16.5)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16.10a)

    므낫세 지파를 위하여 제비 뽑은 것은 이러하니라(17.1)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12)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13)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17.14)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15)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16)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18a)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그를 쫓아내리라(18b)

  

 

에브라임과 므낫세

 

요셉의 두 아들이 분배받은 기업은 가나안 중앙이다(16.1-4).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얻은 이곳은 그야말로 비옥하고 기름진 땅의 표본이다. 요셉의 자손(에브라임과 므낫세, 48.3-6)은 야곱의 예언대로 두 배의 기업을 분배받는다. 특별히 장자권과 관련하여 동생인 에브라임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이스마엘 vs 이삭) 이삭(에서 vs 야곱) 야곱(요셉 vs 유다) 요셉(므낫세 vs 에브라임), 그리고 다윗(압살롬 vs 솔로몬) 등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저들의 장자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과는 많이 달랐다는 점이다. 자녀에게 만큼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다를 수 있다는 점, 오늘 본문에서도 만나게 된다.

한편 요셉의 후손들이 얻은 땅은 실로(16.6, 18.1, 19.51), 여리고(7), 에발산과 그리심산(8.30-35) 등 매우 중요한 곳들을 포함한 복된 땅이다. 그럼에도 불평(불신앙)을 늘어 놓지만 여호수아는 매우 적절한 도전을 준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분위기를 꼬집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17.14-18).

   

 

에브라임 지파(16.5-10)

 

    [장자권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 12지파]

    ∙혈통적 장자 르우벤

    ∙실질적(상속적) 장자 2(갑절)/요셉 - 2지파

        − 므낫세(조부 야곱 - 왼손을 안수하며 축복)/아버지 요셉

        → 에브라임(조부 야곱 - 오른손을 안수하며 축복)/조부 야곱

    ∙언약적(영적) 장자 유다 메시야(예수 그리스도)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종을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였다(10, 7.1-26). 이처럼 의무에는 무관심과 불신앙을 나타내 보이면서도 권리에는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다(17.14-18). 여호수아가 자신의 지파에 속하였기에(13.8) 이런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셉의 차자(次子)이면서도 먼저 기업을 분배받은 것은 조부(祖父) 야곱에게서 장자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48.8-20).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통한 예언의 성취에 언제나 신실하시지만 에브라임은 그렇지가 못했다(10). 이 대목이 유다 지파와 비교되는 지점이다. 유다는 영적 장자권(언약적 장자권)을 따라 여호수아 이후의 정복을 완수하는 일에 선봉에 섰으며(1.1- ), 후에 남왕국 유다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물질적 장자권(실질적/상속적 장자권)을 받은 에브라임은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통해 몰락해 갈 때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북왕국의 멸망을 선도하는 그 중심에 서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렇듯 어제와 오늘이 좋지만 내일과 미래까지 계속해서 좋은 게 아닌 것은 에브라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역시 이미 받은바 은혜와 축복을 다시 무엇으로 보답하며 살아가는가를 에브라임을 통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므낫세 반 지파(17.1-13)

 

므낫세의 장자 마길의 자손들은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을 할당받았고(1, 32.39-42, 3.13-15), 여기서는 남은 반() 지파가 분배받았으나 이들 역시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12-13). 불신앙은 도미노처럼 가나안 온 땅에 급속도록 번져가고 있다. 정복의 땅들이 점차 들어나는 것은 어느덧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스라엘(‘’)은 부정적인 영향력이라는 대단한 힘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주목할 만한 일은,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아마도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모양이다(4). 지금 딸들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는 약속을 기억해 낸다. 이는 광야시대 때 모세를 통해 딸에 대한 기업 상속법(27.1-11)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딸들이 기업 분배에 참여한 것은 아들이 없이 죽은 아버지(가문)의 이름을 계속 잇게 하는 것으로써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신 축복이라는 점을 밝히 드러내 준다.

하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기억해 내고 또 그대로 행한 말씀은 그것으로 충분한 메시지가 있지만 저들이 이처럼 되찾아야 할 말씀은 분배에 대한 율법(말씀), 하지만 그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 이것만이 아니다. 이것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정복을 명하신 말씀을 그대로 성취해 내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언행(言行)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오직 그말씀대로 준행하면서 가나안으로 하여금 가나안 되게 하는 일을 다 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므낫세 지파는 이를 간과하고 있다.

   

 

부스러기 묵상

 

요셉 자손의 불평이 좀 씁쓸하다(17.14-18).

두 지파이면서도 한 지파의 분깃을 받은 것에 대해 불평한다. 여호수아 역시 에브라임 자손임에도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개척 정신은 가나안(구원) 안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네가) 개척하라.”(17.15,18a)

사실 이들 두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해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이미 큰 민족’(14-15, 26.28-37, 85,200)을 이루었기에 더 큰 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또한 그들이 기업으로 받은 땅은 산지’(숲으로 된 언덕)였기 때문에 그들이 거주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저들이 당면한 문제는 부족한 땅이 아니라 턱 없이 함량미달인 초라한 믿음이었다: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16b)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15b)는 여호수아의 명령(도전)의 원뜻은 나무를 베어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만들라는 의미의 충고였다. 그런데 땀 흘려 노력하면서 만들어갈 의지도 없고,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려는 믿음의 도전도 없고, 그저 여호수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어 주는 땅만을 구하고 있는 배짱이 심보, 이게 요셉의 후예들이 보이고 있는 연약함과 무능력의 실체다.

답답한 것은 요셉 자손들인데 어찌된 일인지 여호수아가 더 답답해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또 다시 이처럼 토로하고 있다: “너는 큰 권능이 있은즉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7-18)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넘어서면서부터 말 할 수 없는 승리(영광)와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아직도 영적(靈的)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고 있는 성인아이들의 철딱서니 없는 몰골이 부끄럽기만 하다.

여호수아의 마음, 아니 하나님의 마음은 또 오죽했을까. 모든 능력을 다 빼앗겨버린 무능력의 대명사 삼손처럼, 광야를 거쳐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온 가나안 시대의 주인공들로서 화려했던 지난날들에 비해 초라하디 초라한 모습으로 미래 앞에 서 있는 요셉 자손들의 모습, 어쩜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난다.

지난 정복시대를 하나님을 믿는 신뢰와 도전으로 하나씩 채워왔다면 미래 역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지칠 줄 모르는 신앙 하나 붙들고 도전해가야 할 열려있는 땅이 아닌가. 그저 다 차려진 밥상이나 받아 내 배나 채우겠단 심보로는 가나안다움을 이룰 수 없다. 지금 요셉의 후예들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믿음의 신발끈을 동이는, 그래서 요단을 맨발로 건너던 바로 그 초발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 가나안은 기회의 땅이다. 믿음은 현상 유지만을 위해 주어진 녹슨 멜로디가 아니다. 이렇게 유약하고, 현실 안주만을 추구하는 것은 가나안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전면으로 상치되는 것일 뿐이다. 어딘지 모르게 퇴락해 가는 한 믿음의 가문의 몰락을 목도하는 것 아닌가 싶어, 요즘 돌아가는 세상만큼이나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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