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入가나안 기념부흥회(수 8.30-35)

20210530(양무리교회)-강해12

 

 

 

가나안 기념부흥회

Josh. 8.30-35

 

    본문 관찰

 

    여호수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축복과 저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27.1a)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27.4)

           →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30)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대로 모든 일을 행한다(27.4-8).

그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이끈 영적 지도자였다. 그의 모든 지도력은 말씀으로부터 나왔고, 자신은 언제나 그 말씀의 뒤에 서기를 원했다. 그는 모세처럼 철저하게 말씀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종이었다. 가나안 정복전쟁 승--(6-7-8) 바로 그 뒤에 모세의 축복과 저주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체험해 봄으로써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극적인 메시지를 시각화한다.

본문은 한 예배자의 부흥을 소개해 준다. 이 예배의 부흥은 성공(축복, 승리) 그 바로 뒤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실패 뒤에 찾아온 외양간 고치는 회개보다는 성공 뒤에 찾아온 은혜의 보답과 그것을 위한 예배의 회복에서 이렇듯 성도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 받는다.

   

 

예배하기(30-33)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에발산에 한 단을 쌓은 는 두 번째 아이성 공격, 그러니까 제2차 아이성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다. 이 승리는 특별히 실패 뒤에 찾아온 성공이었기 때문에 자칫 흥분한 나머지 본질을 놓치기 쉬울 수 있었다. 많은 경우 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수 있는 때는 실패한 때이기도 하지만 종종 성공(승리, 만족, 기쁨, 축복)의 때일 경우가 더 많다.

여호수아는 백성(승리)을 위하여 자축(잔치)하며 기뻐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위하여예배자(제사)로 서기를 원했다. 그는 아이성의 교훈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빛나게 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실패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 그럴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공(형통, 감사)할 때를 아는 것이며 그럴 경우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이다.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이럴수록 더 긴장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도 한 사람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모두가 전쟁의 승리에 취해 있을 무렵, 오직 한 사람 여호수아만은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향한 초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예배의 회복을 꿈꾼다. 여호수아의 비전은 예배의 회복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를 이와같은 예배자로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진정한 영적인 필요를 깨닫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는, 그것을 예배로 올려드리는 자가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다.

한편 여호수아는 예배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즉 승리에 들뜬 나머지 주관적으로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31a) 준비하였다. 여호수아는 서두르지 않고 말씀대로 제사(예배)를 드릴 제단을 만든다. 제사(내용)를 위해서는 제단(형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형식(제단)만 남게 되면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내용(제사, 예배)이 풍성해지는 것과 형식(제단)은 함께 간다. 따라서 단과 제사는 하나다.

좀 지나친 나머지 형식(제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 됐지 거기에 무슨 이런 저런 형식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아!” 하면서 어떤 형식 없이 막 대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얼마나 자기 형식에 찌든 것인가!).

이스라엘의 에발산 예배(부흥회)는 크게 둘로 되어 있는데 먼저 번제를 드렸다. 번제는 소나 양과 같은 제물 전체를 불로 태워 그 향기를 드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과 완전한 헌신을 목표하는 자발적인 제사다. 또한 화목제를 드렸다. 이 제사의 특징은 흠 없는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화목(화평, 평화)을 소망하는, 역시 번제처럼 이 제사 또한 자발적인 제사다. 이로써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불화하기를 원하지 않고 이 축복(약속)의 땅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는 예배자의 간절한 소망을 본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33a)

 

예배는 여호와의 언약궤앞에서 행해졌다(33a). 하나님이 예배의 주체이심을 잊지 않았다. 예배자는 온 이스라엘이다(33a). 인간은 모두가 다 예배자일 뿐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이다. 한편 예배자들 가운데 본토인과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35절에 보면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었다. 놀랍고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아닌가(3.28).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이나 어떤 자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1.12). 혈통적 유대인이다는 이유로 저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태어나는 자녀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당신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 오직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여든 사람을 그 은혜로 받아 주신다.

   

 

계시의 증언(34-35)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34)

 

예배의 순서 가운데 여호수아에 의해 선포된 말씀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율법의 모든 말씀이었다: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35b) 그는 말씀을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 여호수아는 결코 율법책을 지배하는 자, 주도하는 자, 움켜 쥔 자로 행세하지 않았다. 예배자로서 또한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한편 말씀은 다음 두 가지로 그 균형을 언제나 유지되어야 한다. ‘축복과 저주가 그것이다. 언제나 이 둘 다를 말하고, 또 들어야 한다. 칭찬만 듣고 자란 자녀는 이기적이며, 훈계만 듣고 자란 자녀는 소극적이다. 다 한 쪽으로 치우친 결과다. 새는 두 날개로 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둘을 동시에 주셔서 겸손과 온유로, 그러나 교만을 피하며 사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여호수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말씀을 설교하였다. 말씀은 언제나 복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듣기에 거북한 저주하는 율법의 말씀 또한 설교하였다. 말씀을 떠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놓이게 된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들(축복과 저주)을 모두가 다 듣게 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35)

 

 

부스러기 묵상

 

이스라엘은 승리의 축제가 조금 달랐다.

그만큼 성숙하였다. 자축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다. 자화자찬(自畵自讚)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매함에 빠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 사람의 참 예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참 예배자를 찾으신다(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을 실패한다. 나 역시 언제나 예배에 모든 승부를 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예배지가 되고 싶다. 그 믿음과 갈급함을 따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예배자로 선다면 그분은 우리를 반드시 만나 주실 것이다. 우리의 행복과 기대와 믿음이 서 있는 곳은 바로 예배하는 곳이다.

한편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의식을 치른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기자는 뭘 의도했을까. 사실 흐르는 이야기의 문맥을 놓고 볼 때 오히려 본문(30-35)92절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경우 보통 이처럼 절박할 때 기도하고 예배하지 않은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앞서 생각해 보았듯이 여호수아는 전쟁이 -하나님과 의식(예배)로부터 분리된- 단순히 영토를 얻는 싸움(땅뺏기)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또 하나의 삶의 현장으로 보았다.

전쟁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면 삶의 전 영역 중 하나님의 지배권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예배는 영적 전쟁을 치르는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영육의 힘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다. 또한 여호수아는 이 전쟁은 물론 또 앞으로 치러질 전쟁들에 아간의 범죄와 같은 패배의 원인들이 놓이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대로 순종함으로써(27.4-8)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언약을 준수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가나안을 가나안 되게 한다.

실패를 이기는 것을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를 하나님의 승리로 잇게 하는 예배자 여호수아를 만난다. 예수님이 그러하신다. 허물과 죄로 죽은, 그래서 사망으로 끝이난 인생이지만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사, 그러니까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어주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예배 이후를 하나님의 자녀로 승리케 하셨다. 이것이 예배의 영광이다. 여호수아에게서 배우 예배를 통해 우리가 주께 드릴 인생보고서를 바라본다. 승리에 담아낼 주께 드릴 열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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