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심어 출애굽기에서 거둔다1(창 50.15-26).

20200925(묵상)

  

 

 

창세기에 심어 출애굽기에서 거두다.

Gen. 50.15-26 

 

   본문 분석

 

   진정한 용서(15-21)

   요셉의 생로병사(22-26): 또 하나의 시작

  

 

창세기(創世記)인가, 멸세기(滅世記)인가.

 

아버지 야곱이 죽은 이후, 조금은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형들의 두려움이다(15). 아버지라는 보호막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온전한 신뢰와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한편 애굽으로 이주한 게 목적은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자 출발에 불과하다. 여기에 대한 야곱의 12 아들들의 보이지 않는 창세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가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진정한 용서(15-21)

 

   ⑨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17b)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또 하나의 모의를 한다.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양새를 만들지만 그것은 또 다른 거짓말에 기초한 거짓 입맞춤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요셉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물을 흘린다.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눈물, 그 여덟 번째 눈물이다.

죄는 이처럼 두려움을 동반한다. 요셉은 이 죄의 값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손에 있지 않음을 알았고, 이를 또한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형제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꾸셔서 이루신 일을 이처럼 고백하는 것으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그리고 간곡한 말로서 형들을 위로한다(21).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듯 진짜 용서는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을 보고, 알고, 믿고, 느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에서 일어난 일과 사건을 읽어내고 해석하고 이해해 낼 수 있는 영적 용량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 고통과 고난이 별이 되는 것은 그것을 오랜 시간동안 품고서 섭리에 순응할 때 일어난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셉의 생로병사(22-26): 창세기에 심어 출애굽기에서 거두다.

멸세기(滅世記): 또 하나의 시작

 

요셉 역시 그의 선조들처럼 약속의 땅,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믿음을 따라 그 땅 가나안에 대한 유언을 남기고 110년 생애를 마무리한다(24). 그는 창세기에 자신의 육신을 묻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하신 또 하나의 창세기가 문을 열면 거기에 자신도 다아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죽음이라는 멸세기를 이겨내는 요셉의 언약 신앙이 눈부시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찬란한 책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놀라운 것은 장엄하고 위엄 있는 <창세기(創世記)>가 어떻게 된 것인지 죽음’, <멸세기(滅世記)>로 그 끝을 맺는다. 이것이 창세기의 독특한 구조이다(1.1 50.26).

, 결말 치고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생각해 보라. 이런 것을 두고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하지 않는가? 명색이 성경쯤이면 그래도 의미심장하게 결론을 맺어야 그래도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닐 때 떳떳하지 않겠는가?

<멸세기(滅世記)>의 깊은 영적 의미들이 있다. 멸세는 철저하게 창세와 단절되어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새로운 창조, 낳고, 낳고의 연속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창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창세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멸세에서 곧 바로 신약, 즉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은 창세로의 회기만큼이나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이렇듯 멸세기는 마치 미로의 제로섬(Zero island)과 같다. 복락(에덴의 회복)은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났다. 멸세로부터의 탈출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멸세기로 끝일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불가항력(不可抗力)인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구원은 완벽하게(perfect) 이스라엘을 떠났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를 뒤흔드는 절대위기의 중심부이다. 오직 거역할 수 없는 죽음만이 연속적으로 그들을 맞이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창세기가 멸세기로 일단락 되어 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죄(),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범함으로써 인간은 결국의 멸세의 길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 없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이다.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다. 죄를 범한 인류에게 선언된 하나님의 멸세의 선포를 보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한편 이방 애굽에서 노예가 된 430년은 이스라엘을 창세로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더더욱 고통이 가중되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출애굽기 1-3장의 멸세기사(滅世記史)로 이어지는 참담한 이스라엘의 일그러진 군상들을 보라! 소위 430(12.41, 3.17)과 장정 60만 명이라는(12.37) ‘애굽세대또한 멸세기의 연속선에 있다.

소망과의 절대분리인 것이다. 이 시기는 창세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으로도 되돌아가지도, 건너 뛰지도 못하는 철저한 멸망(사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이처럼 멸세가 깊어질수록 창세는 빛난다. 그들은 멸세 쪽에서 타락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단절된 저 소망의 빛,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영광의 나라 -구약 식으로 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마치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처럼 지옥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멸세기가 갖는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어찌 죄인이 영원을 볼 수 있으며, 어찌 사탄 마귀의 자식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됨의 그 맛을 알 수 있으며, 맛 볼 수 있으리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는가? 이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의 연속에서 풀의 꽃과 같이, “아침 안개의 이슬과 같이 그렇게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구원사건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니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전무(全無)하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4.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부스러기 묵상

 

우리 역시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멸세기에 혹 처해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여기서 더 심각한 영적 암()은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그 장벽을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절벽 앞에 호미를 들고 서 있다. 이렇듯 철저하게 이율배반적인 현대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불행하게도 정작 자신이 모른다. 그 절망과 멸세의 절벽 앞에 홀로 외롭게 호미 들고 저항하고 있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소외된, 창세와 그리스도의 구원과 완벽하게 단절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정작 당사자인 자기 자신이 모르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이것 만큼 불행은 없다. 그러니 구원에 대한 생각이나 기대나 바램도 있을 수 없다. 때문에 그냥 처음부터 그는 멸세기다.

하지만 창세기가 이렇게 끝을 맺는다는 말인가. 이러려고 창세기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희망은 여자의 후손을 따라 흐른다. 이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를 타고 흘러간다. 야곱과 요셉 역시 이를 바라보며 해골이라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기를 유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비록 멸세기로 문을 닫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애굽이라는 자궁에서 땅과 후손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마침내 창세기는 에덴을 지나 족장들을 통해서 멸세기를 이겨낸다. 또 하나의 시작은 이렇게 숨을 쉰다.

  하나님의 창세기를 인간은 멸세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창세기가 끝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여자의 후손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심으신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의 12 아들들을 통해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행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회복을 시작하신다. 이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으나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해 창세기의 비전과 꿈과 소망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이렇듯 창세기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 우리는 그 새 싹이 마침내 출애굽기에 움트는 것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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