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형제들의 즐거운 만찬(창 43.16-34)

20200912(묵상)

  

 

 

12 형제들의 즐거운 만찬

Gen. 43.16-34

  

   본문 관찰

 

   두려워하여(18)

      → 그 사람들(10 형제들): “우리를 노예로 삼고”(18)

      → 요셉의 청지기: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23)

          그들이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26; 28)

      → 성취(37.5-11)

   ②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30)

   

 

요셉 vs 야곱의 형들

 

애굽으로 내려가는 두 번째 행렬은 복잡하기만 하다.

계속되는 흉년을 위해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안도감, 그러나 첫 곡식대금이 그대로 곡식자루에 있었다는 것(그리고 이들 다시 가져와 설명해야 하는 당혹스러움), 혹여 우리를 노예로 삼고”(18) 나귀까지 빼앗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 비록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동행케 했으나 무사히 데리고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한책임감, 그럼에도 22년 전에 요셉을 어떻든 죽이기까지는 아니어도 그를 팔아넘겼으면서도 아버지에게는 죽었을지 모른다고 속인 것 등 이런저런 경우의 수가 다시 애굽이 가까울수록 형제들을 떨게 했다.

   

 

꿈이 성취되다(26,28; 37.5-11 참조).

 

   나이                               요셉의 2중 시간표

   17(37.2)                      꿈쟁이 소년

   28(40.1- ; 41.1 참조)   노예생활 11/익명생활 11

   30(41.46)                 노예생활 13/익명생활 13

   38(42.1; 41.53 참조)   총리생활 8/익명생활 21

   39(43.1- )                총리생활 9/익명생활 22

 

이런 긴박함과 긴장감이 엄습해 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걸어가신다. 요셉의 꿈이 응답되기까지는 2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이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26; 28) 22년 묵은 꿈! 22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이 모두가 다 요셉에게는 살아있는 현재의 시간이었다.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돌아보니 이 시간들은 과거에 묶여있는 죽은 박제(剝製)와 같은 게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창고에 던져져 있다가 22년 만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이제서야 퍼즐되듯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어서다.

한시도 멈춰있지 않았고, 의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22년을 살아서 모두들 앞에 성취되고 있다. 비록 형제들은 잊었고(잊으려했고), 아버지는 채색옷만 돌아왔을 때 이미 그가 죽은 줄로 알았으나, 오직 요셉은 노예와 종과 가정총무와 죄수의 신분으로까지 추락한 13년의 한많은 세월을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견디며 이겨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나이 17세에 꾸게 하신 꿈을 이루는 자로 당당하게 응답과 성취의 자리에 올라선다.

   

 

꿈이 성취된 전후의 태도와 모습

 

   요셉                                       형들/야곱

   42.7,8,23 - 알다                  42.1 - 보고

   43.16 - 보다                       42.2 - 들은즉

                                                 42.8,23 - 모르다

                                                 43.22 - 알지 못하다

   43.29 - 하나님 은혜            43.18 - 두려워하다

   43.30 - 사랑하는 마음, 울고     43.33 - 이상히 여기다

   43.31 - 정을 억제하다

   43.34 - 즐거워하다               43.34 - 즐거워하다

 

극명한 대조가 놀랍다. 하지만 독자들인 우리는 재방송을 보는 것이기에 저들의 부적절한 반응과 태도가 한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도 요셉의 형들처럼 창세기의 생방송을 지나는 사람들이었다면 요셉의 형들과 다를 바 없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이 갖는 무능력의 한 단면이다.

앞서 헤브론에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은 요셉이 등장하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서로 고통을 분답하고, 희생함으로써 온 가족에 밀려오는 고난을 이겨보자는 성숙함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상(상대)이 있지 않은가. 헤브론의 사람들이 아무리 그러한다 할지라도 애굽의 총리가 다른 모습으로 지난 해의 약속을 뒤집는다면 일은 다시 미궁으로 치닫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이럴 모를 리 없기에 두려워하여’(18) 언행할 수 밖에 없는 10 형제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요셉은 이 기나긴 22년의 시간 안에 모두가 다 살아있고, 아직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헤브론에 아버지 야곱 또한 살아계시다는, 그리고 1년여 만에 다시 만난 형제들의 모습에서 그는 아마도 콩가루와 같은 가족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고 던져서라도 밀려오는 고난과 고통을 자긴의 몫으로 돌리고자 하는 분위기를 보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동생 베냐민이 건재(健在)하지 않은가.

   

 

부스러기 묵상

 

   “너희의 아버지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27)

 

요셉의 청지기들은 하나님’(23)을 고백하고, 애굽의 총리는 안녕’(샬롬), 무엇보다 동시에 하나님은혜를 토해낸다. 그리고 온 형제들과 애굽의 식사예법에 따라 즐거운 식사(정찬)를 함께 한다. 그러면서도 요셉은 남몰래 눈물을 흠친다. 증오와 적대감에서 올라오는 눈물이 아니다. 어떻든 형제와 가족들 사이에서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헤어져 지낸 세월이 어언 22년이다. 지금도 형이지만 형이라, 동생이지만 동생이라 부르지 못하며 한 공간 안에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요셉은 더 분명해지는 하나님의 꿈, 그 꿈의 응답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이처럼 인생의 여정을 걸어와야 했었다면 이것은 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도 조금씩 정리해 갔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식으로 이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 그는 점점 이 섭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응답을 주님께 올려드릴 준비를 하는 중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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