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눈물(창 42.18-38)

20190922(양무리교회)

  

 

 

요셉의 눈물

Gen. 42.18-38

  

   [창세기, 요셉이 울다]

 

   ①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42.24a)

      ②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울고”(43.30)

      ③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45.2a)

      ④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45.14a)

      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45.15a)

         ⑥ 요셉이 아버지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46.29)

         ⑦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50.1)

         ⑧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더니"(50.10) 

         ⑨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50.17b)

 

   

 

요셉이 울다.

 

요셉은 17세의 꿈쟁이(37.2)였을 때 형들의 모함에 의해 집을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애굽의 노예로,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감옥을 전전하는 파란만장한 생을 13년이나 보낸다. 허송 세월 한 듯하다. 그후 30세에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된다(41.46).

거기서 요셉의 나이 38(풍년 7년 후, 흉년 1), 그러니까 형제가 헤어진 지 21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한다. 하지만 아직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해(45.6 참조) 형들이 다시 곡식을 구하러 왔고, 이때에야 비로소 형제들과는 물론이고 아버지 야곱과도 상봉하게 된다. 그때 요셉의 나이는 39세다. 형들에 의해 팔린 후 무려 22년이 지난 때다.

흥미로운 것은 형들과의 만남이 시작된 때부터 시작된 요셉의 울음이다(). 창세기 기자는 요셉의 총 9번에 걸쳐 눈물을 보인 장면을 소개한다. 그는 17세에 노예로 팔릴 때도 울지 않았다. 13년의 고독한 노예생활에서도, 그 꿈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자신의 인생시간표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물론 총리가 될 때에도, 가족석이 텅빈 결혼식장에서도, 두 아들을 낳아 아버지가 되었을 때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어떻든 Text는 이 대목들에서 눈물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1. 혼자서(42)

 

   ①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42.24a)

 

요셉은 이미 그의 이름이 사브낫바네아로 애굽 이름을 가진 후다(41.45). 한편 요셉은 애굽과 히브리인 사이에 통역을 세웠고(23), 베냐민을 요구하는 요셉의 제안을 듣고 형들은 요셉인 줄 모르기 때문에 지난 세월들 안에 든 어두운 이야기를 다 토해낸다(21-22). 마침내 요셉이 17세 때, 그러니까 21년 전에 일어난 일의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형들은 몰라보지만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고 남모래 눈물을 흘린다().

 

   그들(11) - 확실한 자들(독실한 자)

   그들(13) - 우리들은 12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우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18) -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그들(21) -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르우벤(22) -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셉(24) -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28) -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야곱(36) -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혼자 울고 다시 형들에게로 돌아온 요셉은 형제 중 한 사람’(19)으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24b)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34)고 선언한다. 형제들과 이별하고 21년이 지난 때다. 강산이 몇 번 변한 시간이 흘렀다. 요셉은 마침내 당시 사건의 전말을, 무엇보다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형들을 통해 듣게 된다(32). 한편 형들은 오죽했을까, 그 기나긴 세월을 죄책감에 시달렸을 테니까. 그러나 이 일이 이렇게 되어 지금 자신들 앞에서 이야기되고, 비로소 완전범죄가 끝이 나리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공소시효도 이미 끝난 사건이지만...

하지만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은 헤브론으로 돌아온 아들들을 통해 그간 상황을 듣게 된 아버지 야곱의 반응이다: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는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36)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더 놀랍고 어메이징한 것은 지금 야곱 가문의 모두에게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꿈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한 가정을 진정한 가족(족속, 지파)으로 만들어가고 계신다.

   

 

2. 형제들과 함께(43-45)

 

   ②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울고”(43.30)

   ③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45.2a)

   ④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45.14a)

   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45.15a)

 

유다(44.20) -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이것뿐이므로

야곱(44.28) -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유다(44.32-34) - 이미 두 아들을 잃어본 자로서의 처절한 사부곡을 토해낸다.

요셉(45.3) - 사브낫바네아(41.45)에서 마침내 요셉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다.

 

그리고 다음 해 아우 베냐민을 만나자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역시 남몰래 울고(), 얼마 후 비로소 형들에게 자신을 알린 후 울고(), 다시 형제들과 함께 운다(④⑤).

   

 

3. 아버지 야곱과 함께(46-50)

 

   ⑥ 요셉이 아버지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46.29)

   ⑦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50.1)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더니"(50.10) 

    ⑨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50.17b)

 

[아버지 야곱의 생애]

71(27.42- )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형 에서와 갈등

                        이에 외삼촌 라반이 거하는 밧단아람으로 떠남

91(30.22-24) 외삼촌의 집에 온지 20년에 요셉을 낳음

108(요셉 17) - 요셉이 꿈을 꾼 후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림

121(요셉 30) - 요셉의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됨

                             애굽 흉년 2년차에 만남(45.6 참조)

130(47.9) - 요셉을 만난 후 바로를 대면할 때

147(47.28) - 애굽에 거주하다가 후에 죽을 때

 

고센으로 이주해 온 아버지 야곱을 22년 만에 다시 만난 후 울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아버지의 임종과 장례식 때에 울고(), 그리고 부친의 사후(死後)에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의 언행 앞에서 운다().

   

 

부스러기 묵상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56.8a)

 

요셉의 통곡은 한결같이 형제와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요셉의 울음은 형들을 탓하는 분노와 복수와 원망과 미움과 공격과 분열과 상처와 갈등과 저주의 통곡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가족과 부모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가정과 가족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상처 주고, 넘어지게 했어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의 용량으로 복음을 토해 낼 수 있다면(39.9b, 45.5-8) 우리 역시 요셉의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고, 요셉처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요셉처럼 울 때다. 지금은 요셉의 눈물을 흐르게 할 때다.

그렇다면 요셉의 눈물은 지난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씻어내는 눈물이다. 형제들이 평생 안고 살았을 죄책감을 멀리 흘러내어 버리는 용서의 눈물이다. 다시 부를 형들의 이름이 있고, 다시 만난 사랑하는 어머니 라헬의 또 다른 얼굴인 베냐민을 볼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이다.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버지 야곱을 다시 뵈올 수 있는 감격의 눈물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어린 17세의 소년이었을 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참 많이 운다. 자식도 때로 부모 때문에 종종 운다. 이 눈물이 건강하게 흐를 때는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과 이해와 관계를 더 없이 든든하게 맺어준다. 하지만 역기능적으로 흐를 때는 깊은 상처와 아픔이 되어 영혼까지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슬픈 눈물을 그대로 열매 맺게 놔두시지 않는다. 그 상처와 고통에서 별과 같고 진주와도 같은 보석을 만들어 내신다. 누구에게서 인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와 인도하심과 사랑을 믿고 묵묵히 눈물의 언덕을 믿음으로 넘어서는 사람을 통해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때때로 신앙의 여정에서 요셉과 같은 인생 정거장을 지나게 하신다. 이럴 수 있을까. “하나님, 저런 사람을 성도라 부르며 함께 신앙생활 해야 합니까?” 요셉을 보라. 그는 이 모든 것을 품어낸다. 받아들인다. 이해하고 용납한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며 역사하셨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눈물로 이 모든 것을 품어내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치유하고, 그래서 저주와 상처로 흘러가지 않도록, 오직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흘러가게 해 버리는 것 아닌가.

요셉이 그러한 것처럼 나도 형제들을 보며 흘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눈물이 있는가. 나도 가족들을 보며, 양무리교회라는 거룩한 하늘 가족들을 보며 묵묵히 흘려보내는 믿음과 기도의 눈물이 있는가. 지난 모든 것을 눈물에 담아 흘려보내고 씻어내는 그런 통 큰 은혜의 눈물이 있는가. 만신창이가 된 대한민국을 품고, 점점 순결함과 거룩함을 잃어가는 한국교회를 품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눈물이 있는가. 못나고 연약하고 초라하듯 보이는 누군가를 품고 그 역시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당당히 서야 하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믿어 그 영혼을 품고 그를 위해 지불하는 하늘 아버지를 향한 눈물, 요셉의 눈물이 내게도 있는가.

내 죄가 가슴 아파 이처럼 살다가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룩한 자각이 내 영혼의 샘을 흔들어 깨울 때, 다시금 무릎 꿇고 통곡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고귀한 눈물이 있는가. 지금처럼 살아가다가는 주님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 천국문에 들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부모와 자식과 친구를 기도의 눈물에 담아 주님께 올려드린 거룩한 기도의 제자를 드려본 바로 그 요셉의 눈물이 있는가. 하나님이 왜 나를 양무리교회로 인도하시고 지금 여기 이곳에서 주를 섬기게 하시는가를 알고 믿고 확신하고, 그래서 응답해 드리는 제물되어 살아가면서 남몰래 지불하는 그 거룩한 요셉의 눈물이 있는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고작 돈 없다고, 누가 나를 무시한다고, 목사가 날 알아주지 않는다고, 이 남편(아내, 배우자)과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왜 나에게는 이런 환경과 상황과 형편만 주시느냐며 찔끔거리는 땡깡(억지) 부리는 이기적이고 욕망에 찬 눈물만 있는 건 아닌가. 그러니까 내 손톱에 막힌 조그만 가시가 가장 힘들고 아프고 견딜 수 없다는 수준에서 질질 짜는 눈물인가.

뭐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못나서 흘리는 눈물이든, 잘나서 흘리는 눈물이든 그 모든 눈물을 다 당신의 바다보다 넓은 사랑으로 받아내신다. 그리고 우리를 안아주신다. “다 아시지요!”라며 아무 말 없이 흐느끼는 나를 그대로 묵묵히 안아주신다. 그리고 그 모든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신다. 그 하나님과의 비밀이 하나 둘 쌓이고 만들어져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여정이다.

요셉을 보라. 그는 울면서 자신 안에 고여있던 분노와 절망과 아픔과 외로움을 하나 둘 다 흘려 보낸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알고 믿는 자이기에 그 안에 담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다. 분노와 상처와 아픔은 영혼 안에 품고 있으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이루시고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일을 담아도 부족한 것이 마음이고 영혼이고 믿음이라는 것을 아니까.

하나님 앞에 눈물을 뚝뚝 흘려본 적이 언제이십니까. 아무 말 할 수 없어 어깨를 들썩이며, 숨죽이면서, 입술을 깨물어가면서 고통과 절망과 원망으로 채워질 그 영혼의 공간에 하나님과 은혜와 사랑과 섭리와 하나님의 응답이 채워지기를 바라던 그 몸부림이 언제적 기억이시나요. 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이다. 나를 품고, 가족을 품고, 교회를 품고, 뭇 영혼을 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자,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고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지불해야 할 그 눈물이 내게 필요하다.

 

   “내 맘이 낙심되며” (300)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 하며 내 짐을 지시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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