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살 요셉, 지키어 인내로!(창 40.1-23)

20200315(양무리교회)

  

 

 

스물여덟살 요셉, 지키어 인내로!

Gen. 40:5-23

  

   [요셉의 생애와 하나님]

 

         야곱의 아들들

         레아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라헬 요셉 베냐민

         빌하 단 납달리

         실바 갓 아셀

 

   ▪34.25 시므온과 레위: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다.

   ▪35.16-22 어머니 라헬이 동생 베냐민을 낳고 죽는다.

   ▪35.22 르우벤: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다.

 

   17(37.2) : 꿈을 꾸다.

      37.28 요셉: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리다.

               ▪요셉이 창세기의 시야(아버지와 형제들)에서 사라지다.

       ➜ [노예]

               ▪38.29-30 유다: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다.

           ➜ [보디발의 가정총무]

        #섭리ab 39.2,3(임마누엘, 형통)

      39.9 보디발의 아내에게: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의 죄수]

        #섭리c 39.23(임마누엘, 형통)

      40.8 바로의 관원장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28(“2년 후”, 41.1 참조): 11년 후(다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하다)

        #섭리- 11

   30(41.46): 다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하다(2)

                     ➜ [애굽의 총리] - 13년 후(꿈이 이루어지다)

        #섭리➌ – 11+2

      41.16 -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대답을 하시리이다.

      41.25,28,32 -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요셉행전: 17+(11+2) = 형통

 

성경에 등장하는 꿈의 특징이 있다. 꿈은 요셉에게 꾸어진다. 요셉이 소설을 쓰듯 자신이 원하는 대로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종종 꿈을 통해서도 역사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꾸는 꿈과 성경에 등장하는, 특별히 요셉이 꾼 꿈은 다르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목적을 위해서 요셉의 꿈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바로의 두 신하들의 꿈, 그리고 바로의 꿈 역시 동일하다.

  

 

요셉행전: 17+(11+2)

 

창세기 40장은 2년 후에 바로가 꿈을”(41.1) 꾸기 때문에, 바로의 두 신하의 꿈을 해석하는 때의 요셉의 나이는 28세다. 그 이유는 41장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나이가 30(41.46)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오기 이전 고향에서 꿈을 꾼 나이가 17(37.2)였으니까 창세기 37장에서부터 40장까지는 11년이라는 세월이 들어있는 셈이다. 이 긴 세월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A. 가족(가정) - 형들, 아버지: 사고나 치고 있는 가족들

   ▪34.25 시므온과 레위: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다.

   ▪35.16-22 어머니 라헬이 동생 베냐민을 낳고 죽는다.

   ▪35.22 르우벤: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다.

   ▪38.29-30 유다: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다.

 

아버지 야곱은 20년 타양살이(외삼촌 라반, 밧단아람, 31.38)를 마무리하고 귀향길에 오른다. 그 노정에서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된 후(32), 형 에서와의 화해까지는 좋았다(33). 그런데 가던 길을 멈추고 세겜에 땅을 사고 정착하다가 그만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 일 때문에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뭔가 창세기의 이야기, 곧 야곱의 이야기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시 벧엘을 지나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막둥이 베냐민을 낳고 죽는다. 그리고 장자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등 이런저런 풍파가 어디로 흐를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떻든 야곱는 어딘가 모르게 중심을 잃고 요통치시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마저 죽어 버리고, 그가 입던 채색옷만 야곱에게 돌아온다.

천하의 야곱 아닌가. 얍복 나루터와 벧엘에서, 그보다 먼저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던 바로 그 야곱이다. 그런데 아들들, -장자인 르우벤이고, 제사장의 가문이 될 레위이고, 메시야의 조상이 될 유다이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다. 요셉은 그 와중에 하나님이 꿈으로 나타나 주신 더 특별한 아들이다- 다 유력한 자들인데 이런저런 일들로 그만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린다.

,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이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이미 죽었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 역시 죽었다. 물론 창세기의 독자들에게는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고, 그는 지금 11년이라는 세월을 하나님 앞에 넉넉하게 승부하고 있는 중이지만 아버지 야곱에게는 죽은 아들이다.

이미 조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 그리고 야곱 자신에게까지 하나님은 땅과 후손의 복을 약속했었다. 무엇보다 귀향길 벧엘에서 하나님이 친히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는가(35.1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그런데 가족들, 가정과 자녀들은 지금 가관이 아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였는데 지금 아들들이 아버지인 야곱을 속이고 있다.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를 속였는데 지금 형제들이 형제들을 속이고 있다. 요셉을 자기들 손으로 팔았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악한 짐승에 잡아 먹힌 것처럼 거짓으로 아버지 야곱의 가슴에 비수를 꼽는다.

이런 세월이 고향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도 11년이다. 결국 야곱의 11년의 이야기가 고작 유다 이야기 뿐이다. 얼마나 가난하고 형편 없음인가. 이스라엘인 야곱이 버티고 있어도 그들 야곱 공동체는 어찌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다. 무슨 락()이 있겠는가. 이렇듯 요셉은 이미 죽은 자였으니 그를 위해 아버지 야곱이 한 일이 없다(기도, 축복, 면회. 영치금, 보석 신청, 탄원서, 애굽과 외교적 협상, 유학, 결혼식 참석, 손자 돌잔치, 유산 배분 등).

이렇듯 위대한 야곱 가문은 초라하게 보일만큼 흔들리는 중이다.

 

   B. 요셉 자신

       ▪17: 꿈을 꾸는 자(37.5-11) 꿈을 해석하는 자(40.8)

        | [노예]

   섭  |    [보디발의 가정총무]

   리  |   #섭리ab 39.2,3(임마누엘, 형통)

   ➊  | 39.9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➋  |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의 죄수]

   ✚  |   #섭리c 39.23(임마누엘, 형통)

 

 

       ↓40.8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28(“2년 후”, 41.1 참조): 11년 후 - 꿈을 해석하다.

           #섭리- 11

 

그 사이 요셉은 꿈을 꾸고서 곧바로 노예로 팔리고, 그의 생은 곤두박질친다. 하나님이 흔들리는 형들과 비교해 요셉에게는 꿈으로 찾아오셨다면 12 아들들 중에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뒤를 잇는 어떤 흐름을 기대해도 틀리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데 애굽에 팔리고, 이어 야곱 공동체로부터 사라진다. 더 놀라운 것은 요셉의 반응이다. 이쯤에서 요셉이 하나님께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궁금하다.

그런데 요셉을 보라. 가장 무너져 있어야 할 사람이고, 누구보다 회복불능상태여야 맞아 보이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형들에게 원수를 갚겠다며 어떻게든 살아 남아 있어야 할 사람처럼 생각되는데 그는 보통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다. 왜 요셉인가? 왜 요셉의 11년인가?

지금 무엇을 오늘 말씀에서 생각하고자 하는가: 요셉처럼 받아든 우리의 11년은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요셉이 꿈으로 시작하듯 우리 또한 은혜와 구원과 새생명 가운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요셉처럼 11년인가.

하나님이 11년 전 어느 날, 나에게도 은혜와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래서 희망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역시 그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과 축복 안에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나는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찬양하며 비록 흔들리기는 하지만 흔들리면서 피는 꽃처럼 그렇게 요셉과 방불한 삶의 자리에, 변함없이 요셉처럼 지난 11년을 한결같이 주님 곁으로 걷고 있는가.

17세부터 28세까지의 요셉, 꿈을 꾼 이후부터 노예, , 가정총무, 죄수, 감옥으로 이어지는 37장부터 40장까지의 요셉의 태도와 삶의 자세가 하나님 앞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게 맞고 옳다면,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믿기 신앙을 가진 이후로 지금까지 되는 일 없고, 더 흔들리고, 아프고, 상처나고, 넘어지고, 이러다가 내 인생 끝나는 거 아닌가 싶은 여정에서, 바로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요셉처럼 일 수 있는가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예수 믿고 살아온 17세부터 28세까지의 내 모습이 어떠느냐는 얘기다. 그 요셉을 보면서...

, 그럼 무엇이 17세부터 28세까지 이 11년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오도록 했을까. 그때는 양무리교회도 없었는데 말이죠. 이것은 그의 17살에 꾼 28살에 을 해석하는 것을 좀 더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꿈을 꾸다(5-11,16-17): 그들은 해석하지 못하다.

꿈을 해석하다(12-13,18-19):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

 

오늘 본문에는 꿈을 꾼 두 사람이 등장한다. 먼저, 저들은 자신들이 꾼 꿈의 해석을 알지 못한다. 꿈을 꾸었지만 그 꿈과 자신이 어떻게 관계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둘째로, 꿈 때문에 근심한다. 셋째, 그러니 당연히 꾼 꿈 안에 든 하나님의 섭리를 알 턱이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와 상관없이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신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진다. 그 꿈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그들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에도다.

하지만 요셉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17세 때 자신이 꾼 꿈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이 꿈으로 요셉에게 오셨고, 그는 그 꿈의 의미와 응답까지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11년의 애굽살이(노예살이, 죄수살이)라는 요셉행전은 그럼에도 그 꿈을 신뢰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자신이 꾼 꿈과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요셉의 처지와 상황을 둘러싼 모습에서 그렇다.

이때 만약 그가 계속되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이제는 꿈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래서 꿈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면 요셉은 8절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은 꿈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뢰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지금 당하고 있는 시련마저도 자신의 꿈을 방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강력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그가 당면한 현실을 바꿔달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그 꿈을, 그럴수록 더 간직하고 붙들었다.

, 무엇인가: 그는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17세에 꿈으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 그랬기에 어머니 라헬을 일찍 하늘로 보내드리고 잘난 형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자신을 찾아오사 꿈을 통해 비전을 주시고, 내일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요셉 너를 벧엘에서 네 아버지 이삭에게 한 약속을 이루는 자로 사용할거야하시며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을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의심한 적 없고, 원망한 적 없었다. 그러니까 11년은 그렇게 붙든 자신이었고, 꿈이었고, 하나님이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그 꿈 하나,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들고 [노예] [보디발의 가정총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의 죄수]라는 처참하고 참담한 11년을 이겨냈다. 그의 고백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8) 이 무슨 말인가. , 나는 하나님께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해석자요 주인이십니다.

놀랍지 않은가. 11년이 지났다. 꿈을 꾼 것도, 그 꿈을 해석해 본 것도 벌써 11년이라는 세월 속에 들어있다. 그런데 11년 만에, 그것도 이번엔 자신이 꾼 꿈도 아닌 이방인의 꿈,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의 꿈을 그냥 들어만 봐도 알아낸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는 11년 전에 자신을 꿈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날 이후로 지금껏 천지는 변해도, 고향을 떠나 죄수의 몸으로까지 추락하고 미끄러져도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는 그렇게 11년을 하루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네 삶의 자리가 노예고, 종살이고, 감옥일지라도 하나님, , 말씀, 은혜, 믿음, 소명, 사명, 달란트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면 환경이나 여건이나 상황은 1순위(우선순위)가 아니다. 후자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혼돈하지 않아야 할 생각이고 시각이고 방향이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8.15)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요셉만큼은 아니어도, 지금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을 무엇으로 사는가. 내 지나온 11년은 어떻게 요약하고, 정리하고,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나에게도 하나님이 처음 나를,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의 나-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고, 살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그래 너는 내 것이라아들 삼아주신 그 첫사랑을 있다. 그래야 지금 지살아가는 11년을 버티고, 이기고, 요셉처럼 그것을 이루는 자리에 설 수 있다. 성도는 이것 하나로 버티는 자다. 지치고 상하고 쓰러질 때 다시 그곳으로 가면 나를 동일하게 만나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 그 첫 사랑이자 구원의 은혜가 임한 바로 그 영적 자리를 다시 찾고 기억하고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도 유지하며 붙들고 살아내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만져주신 꿈, 하나님의 자존심이 서는 자리다.

요셉에게 그것은 17세 때 이었다. 요셉은 이처럼 꿈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했다. 꿈으로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분, 하나님을 붙들었다: ‘내가 너를 특별히 지켜보고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너를 지켜볼 것이다.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며, 내가 너를 야곱에게 벧엘에서 이른 약속처럼, 너에게 꾸게 한 꿈대로 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스물여덟살 요셉의 자존심이다.

요셉은 스물여덟살짜리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땅이 맺는 열매는 하루 아침에, 자동적으로 열매 맺지 않는다. 나를 붙들어주고, 이기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쪽으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요셉에게는 꿈이었던 것처럼 오늘 나에게도 그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 11년 동안 이어온 오늘이어야 한다.

이것이면 지키어 인내로!’라는 말씀이 역시 나의 간증이자 열매일 수 있다. 내가 써 가는 열일곱살짜리 꿈, 스물여덟살짜지 꿈, 11년째 흔들리면서 피는 꽃, 진정 요셉 같습니까? 그러면 감옥이어도, 죄수여도, 다 잃고 빈털터리여도, 괜찮다. 요셉이면 충분하다.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이 소망과 믿음이 있다면 우리네 삶은 살만 하다. 가슴 뛰며 이 험한 세상을 걸을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꾸도록 넣어주신 ’,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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