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주의보(창 39.1-23)

20190616(양무리)

  

 

 

형 통 주 의 보

Gen. 39.1-23

  

   본문 분석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20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이라는 사람

 

마침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여기까지 흘러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의 인생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꾼 꿈에 의하면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간들은 허비되는 것 같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생각(계획, 섭리)과 우리의 생각(기대, 바램)이 다른 부분이다. 우리는 형통이라 쓰고 고난이라 읽으라고 하면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포장지 안에 든 형통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먼저 고난의 언덕을 지나야 한다고 말씀한다. 39장이 그러하다.

   

 

20, 22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20)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20)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22)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일생에서 어떤 감동을 받거나, 또한 요셉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많은 것을 지나쳐 버릴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답만 알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풀어낼 실력이 없기에 정답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요셉을 보면서도 그렇다.

여기서 하나의 기초적인 전제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요셉은 감옥 이후의 시간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옥살이를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요셉의 감옥 이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요셉 역시 알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의(自意)에서가 아니라 타의(他意)에 의해서 그의 생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평을 듣는다.

어떻든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서도 매우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놀부처럼 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영광과 성공의 아침이 온다고 생각하면서 결과적으로 올 복을 위해 그냥 견디고 참으며 이겨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난 앞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요셉이다.

 

1.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

 

그가 옥살이를 하게 되기 전에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행한 고백을 다시 기억해 보자.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먼저, 그의 일생을 간단하게 조망해 보자. 꿈을 꾸는 소년 형들의 시기 웅덩이 애굽에 팔림 보디발의 가정총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그리고 감옥이다. 바르고 정직하게 산 대가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요셉은 당당하다. 왜일까요? 요셉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거나, 꿈을 해석하는 능력만큼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잠시 자나가는 소나기와 같은 이런 시련들 정도는 능히 이겨내는 능력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1) 환경은 변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셉은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 다른 옷을 입고 거기에 적응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방식대로 역류시키려 하지 않는다.

 

(2) 어디에 있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살았다. 자신의 시간표가 아무리 일그러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변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2.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23)

 

요셉이 요셉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그러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요셉은 그런 사람이다. 그가 이처럼 영적 거인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 때문이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요셉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역시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혔으나 전옥에게 곧바로 신임을 얻고 그곳 안에서도 제반 사무를 다 맡게 되었다(22-23). 보디발의 집에서 하던 일이 감옥에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형통이 뭐길래: 형통주의보

 

요셉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은 이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이해가 되시나요? 성경이 요셉을 우리에게 소개할 때 사용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형통이라는 단어이다. 참 묘한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단어이다. 성경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후를 설명할 때 그가 형통했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지금 요셉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 말하고 있다구요?

 

1. 요셉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형통하다.

 

하나님이 형통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중요한 전제다. 감옥과 형통은 무슨 관계일까? 감옥의 죄수로, 그것도 바르게 살겠다는 것 때문에 발생된 오해와 누명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처 해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향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이점이 우리가 매우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1) 이 역설의 진리를 알고, 믿고, 깨닫는 자가 복되다. 당신은 지금 요셉과 같은 고통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때 너는 형통하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그것이 당신의 영적 수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넘어진다. 우리 역시 지금 이 시간에도 무수한 감옥들을 통과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 아래 진행된다는 것을 믿든 믿지 않든,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나간다.

마치 요셉이 자신의 일생이 전개되는 시간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곳 감옥에까지 오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요셉은 더 나은 미래의 그 무엇 때문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면서 자신이 당하는 일련의 시련들을 위해 어떤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그때 그때를 묵묵히 인내하고, 그래서 연단 받고, 또 소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가 그것을 예상하고 어떤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시각이다.

 

2. 나는 왜 감옥에서 형통하지 못하는가?

 

우리 인생은 수 많은 감옥을 통과한다. 요셉만이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요셉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이 오히려 그를 형통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감옥이 실패를 더 분명히 해 주는 것이 된다. 왜 그럴까요?

 

(1) 이제 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는 것은 형통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무섭다. 많은 경우 우리는 형통을 그냥 좋은 것, 잘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감옥은 형통이 아니라고, 형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확신해 버린다.

a. 이처럼 나의 형편과 모양에 따라 춤을 추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감옥에서 결코 형통할 수 없다. 그는 거기서 포기하고, 실패를 선언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만다.

b. 많은 사람들이 감옥 비슷한 것을 만나기만 해도 기겁을 한다. 무엇이든 좋은 것만이 하나님의 응답이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요셉처럼 되었을 때에 그가 행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를 바르게 알게 된다.

 

(2) 실패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거룩한 영적 감각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것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믿는 사람은 실패처럼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 않는다.

a. 그는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셉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은 감옥에 있는 요셉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시간 동일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포기한 것은 나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은 나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한 것은 나다. 하나님이 아니다.

 

(3) 바울에게서 배운다. 바울 역시 이 비밀을 익히 알았다. 그는 자신의 환경에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형편이나 모습에 따라 하나님을 다르게 생각하는 미성숙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따라 살았고, 하나님이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걸림돌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빌립보 감옥에서 그가 보인 반응이다(1.13,14,17):

 

내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바울의 고백이 이어진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4.13-14)

 

바울은 11-13절까지 사는 시간들을 무엇이라 말하고 있나요? , ‘괴로움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비밀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세상적인 형통으로 계산될 수 없다. 이것만큼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3. 당신은 형통한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다. 요셉이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형통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긴 견고함에 있다. 형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덤으로 주어진 복이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위기의 때에 오히려 강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고난의 파도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파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을 향해 나아갔다. 고난의 파도타기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형통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형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어떤 행위를 동원하고 -예를 들자면, 금식하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하는 것들과 같은 그런 종교 행위들을 동원해서 결국은 내가 목적하고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오는 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원하는 식의 형통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시는 하나님 편에서의 형통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영적 균형과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바로 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형통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일들 앞에 당당하게 살 수 있다. 결코 눈에 보이는 짧은 이익 때문에 비굴하게 살거나, 이 세상의 탐욕과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뒤로 밀어내는 그런 어리석음은 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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