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이야기(창 38.1-30)

20200903(묵상)

  

 

 

유다와 다말 이야기

Gen. 38.1-30

  

   여자의 후손(3.15)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

       → 유다(+다말) 베레스

           → 살몬(+라합) 보아스

               → 다윗(+밧세바) 솔로몬

                   → 요셉(+마리아) 그리스도

   

 

근친상간(近親相姦)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1.3a)

 

사실은 시부(媤父)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의 불륜이다. 참 꼬여도 묘하게 일이 엉킨다. 하지만 이렇게 태어나게 했어도, 동시에 이렇게 태어났어도 아들 베레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으로 이어지는 메시야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다.

   

 

야곱의 아들들

 

   밧단아람에서 12 아들을 낳다(35.23-26)

   [1] 레아 – ①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 딸 디나

   [2] 라헬 – ⑪요셉 베냐민

   [2a] 빌하 – ⑤납달리

   [1a] 실바 – ⑦아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고향으로 출발하기까지 결정적인 이야기를 기억한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이스라엘이 되고, 형 에서 아들들에게는 큰아버지다.- 와도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마침내 20년 전 하나님께 서원하며 약속을 드린 바로 그 벧엘을 지나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땅을 구입하며 장막을 치며 그곳에 정착한다. 그리고 터진 사건이 바로 외동딸 디나의 강간사건이다. 또한 동시에 터진 두 아들이 행한 복수, 그러니까 세겜 사람들을 복수하기 위해 할례(언약, 17)를 수단으로 삼은 일이 터진다. 바로 이 사건으로부터 아들들이 하나 둘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다, 좀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야곱가문이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천하의 야곱에게서 말이다.

 

   아들들의 일탈 메들리

   ▪시므온, 레위(34) 디나 강간사건에 할례를 복수의 수단으로 삼다.

   ▪르우벤(35.22) -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다.

   ▪요셉(37) - 짐승의 밥이 되어 죽다(애굽의 종으로 팔리며 사라지다).

   ▪유다(38) -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다.

   ▪이방(가나안; 24.3, 28.1 참조) 결혼 유다(38.2), 요셉(41.45), 시므온(46.10)

   ▪10 아들들 요셉 17-39세까지 요셉에 대해 아버지를 속이다.

   ▪형제들(50.17) - 아버지 야곱이 죽자 다시 요셉에게 거짓 유언을 말하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좀 납득이 쉽지 않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b) 여기에는 하나님도, 언약도, 미래도, 약속도, 회개도, 잘못을 깨닫는 낮아짐도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야곱은 지금 모든 면에서 전성기에 서 있는 때 아닌가.

그러고도 르우벤의 사건에,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은 죽었고(사라지고), 이때 10 형제는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일을 종결하고 만다. 그리고서 다시 유다의 사건이니 그것도 유다는 메시야의 족보를 잇는 아들이 아닌가.- 도대체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거인과도 같은 족장들은 왜 다 한결같이 가정과 자녀들에게는 그리도 약할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지만 아버지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다들 맥없는 모습 밖에 보여주는 게 없어서다. 물론 부모의 실력으로 자녀들을 기르거나 세워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큰바위 얼굴과도 같은 아버지를 잇는 아들의 대()에서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유다 vs 다말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12a)

   “유다가 그(다말)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18b)

 

요셉이 팔리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유다 이야기로 넘어간다(3738). 그리고 다시 요셉으로 돌아온다(39- ). 이렇게 볼 때 38장의 위치가 좀 독특하다(34장이 그랬듯이).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며 마음에 둔 아들은 죽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훗날 메시야의 족보를 잇는 아들 유다는 이처럼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아픔과 고통을 맛보며 창세기를 고개 숙이며 지나가는 중이다.

육신의 장자는 아버지의 침상에 오르고, 영적 장자는 며느리에게서 아들을 낳고, 아버지 야곱의 구상에 있는 요셉은 죽은 듯 사라지고 없다. 이게 야곱과 그의 가정의 모습이다. 비유컨대 이런 콩가루 가정이 있을까 정도다. 문제는 이 가정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명문가문(名文家門)이라는데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 야곱은 정말이지 다 가진 자다. 얍복 나루를 건너며 이스라엘이 되었고, 20년 밧단아람 생활에서 거부(巨富)가 되었고, 자식 농사도 이 정도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이룰 탄탄대로가 놓여진 그야말로 영육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다 받아 누리고 얻는 불세출(不世出)의 거장이다. 정말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야곱에게 가정과 아들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을 것 같은 상황이 끊어지지 않는다.

   

 

부스러기 묵상

 

유다는 두 아들을 잃어본 아버지다.

아버지 야곱 역시 아들 요셉을 잃었다. 한편 요셉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는 살아서 하나님이 그를 드러내실 때까지, 그러니까 그가 17세에 꾼 꿈을 이루실 때까지, 시편 기자가 얘기하는 것으로 하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105.19) 그는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매여서 죄수 아닌 죄수로 감옥에 있다.

어쩌면 창세기가 아들을 잃어본 자들(야곱, 유다)을 창세기 37-38장에 나란히 올려놓음으로써 앞으로 이들이 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무엇으로 이겨내게 되는가를 말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창세기는 이처럼 요동치는 중이다.

유다가 며느리 행음한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24b)고 한 것처럼 자신이 그렇게 죽어야 할 자다: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21.9; 22.21 참조) 그런 유다가 메시야의 가문을 잇는 자가 된다. 그럼 야곱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일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서, 이삭은 에서에게서, 야곱은 여러 아들들에게서 피눈물을 흘린다. 당대(當代)는 믿음의 거장들이지만 이어지는 후대(後代)인 자녀의 대에서는 모두가 다 한결같이 휘청거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려운 얘기다. 당장 우리들의 가정과 자녀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그림자이기에 더 그렇다. 이렇듯 부모로서 흘려야 하는 눈물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한 아들은 사라졌고(야곱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아들은 상처(喪妻)하, 그의 두 아들(엘과 오난, 야곱에게는 손자들)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7,10) 죽었고, 하나 둘 이방 결혼을 하면서 조부와 아버지의 유훈으로부터 벗어나고, 여러 아들들 또한 이런저런 스캔들에 흔들리고 있는 야곱의 가정을 보는 중이다.

창세기를 우리 또한 라이브로 살아가는 중이라고 한다면 야곱과 그의 가정,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은 힘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할까. 이렇듯 하나님이 주도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희망 없다는 점에서 역사는 이렇듯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39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7,10)가 어찌 엘과 오난만이겠는가. 그런데 37장의 죽은 아들에게서 구원이 오고 있고, 악한 유다에게서 베레스가 태어나고 있으니 이 기막힌 은혜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으랴. 인생의 죄록을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덮으시니 말이다. 이렇듯 38장에서도 하나님은 묵묵히 앞서 가신다. 그게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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