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보라!(창 9.8-19)

20200111(묵상)

  

 

 

무지개를 보라!

Gen. 9.8-19

  

   본문 관찰

 

    9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11 다시는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4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 이후에 찾아오신 하나님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톡톡히 맛보았다.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은 죽음, 곧 파멸이었다. 영원히 소생하지 못할 하나님의 진노였다. 이러한 무서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는 홍수 이후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그들은 폭우(暴雨)만 쏟아져도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기도 전에 죄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먼저 상대해야만 한다. 얼마나 머리가 하늘로 서는 땀나는 일인가? 사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은 죄악이 온 땅에 점점 관영해 가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심판으로 응징하셨다.

 

1.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1)

 

그런데 그 하나님은 이러한 심판 뒤에 곧바로 홍수 이후 사람들을 찾아 오셨다. 놀랍게도, 그것은 다름 아닌 노아와 그 후손들을 주시기 위해서였다(1). 이처럼 죄의 문제 해결은 항상 은혜(축복)의 방식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마침내 노아와 다시 축복의 언약을 맺으신다(2-10). 그리고 그 언약의 보이는 증거로써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하나님의 가장 굵은 약속의 싸인(sign)이었다.

 

2. 사람들은 가 오면 공포에 사로잡혔다.

 

왜 그런가? 항상 두렵고 또 켕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근심은 여전히 그들을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 때문이다. 결코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노아 이후는 이러한 사실을 결코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홍수 이후에 노아는 350년을 더 지냈고 향년이 950세에 죽었다(28-29). 또한 당시 사람들의 보통 수명이 400-200세였다. 아담 역시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930세를 향유하고 죽었다(5.4-5). 따라서 그는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살아있는 역사(歷史)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노아 자신도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전승 받았듯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에 대한 이야기를 그 또한 후손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노아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기회가 닿는 대로 가르쳤다. 그는 산 증인이다.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아직은 저 아라랏산에 그 형체가 남아있는 방주가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8.4). 홍수를 경험하지 못한 홍수 이후 세대들이 이 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방주를 접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온 몸을 떨었을 것이다: “필경 이 정도라면 나도 예외가 아니겠군!”

그런데 왜 비만 오면 겁부터 났을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3.10,23a)라고 선포한 성경의 선언으로부터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폭풍, 소홍수, 장마, 천둥번개)와 연결된 그 어떤 자연 현상에서도, 특별히 그 기간이 길었을 경우에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기억해야만 했다.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2.1- ), 죄의 결과로 당하게 될 심판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무지개는 희망이다.

 

하지만 비는 언제나 있었다. 홍수 이전에도 있었고, 홍수 이후에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21C를 살아가는 문명의 시대에도 중국(中國)을 완전히 물바다로 만들어 버릴 만큼 의 힘은 대단하게 계속되고 있다. 우리 역시도 여름만 되면 홍수 피해가 쉬지 않고 있다.

 

1. 어느 때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장마 때처럼 이제 그치겠지. 지나가는 소낙비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때때로 하루, 한 주, 한 달, ,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인가? 동시에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러자 오늘 우리 식으로 하면 회개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교회를 방학했던 발걸음이 주일날 예배도 빠짐없이 다시 나가기 시작하고, 헌금도 드리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기대하는 낮은 포복을 했음직 하다.

그런데 [늑대 소년의 이야기]처럼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그런 일이 반복되어도 심판은 없고, 그래서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하니까,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라며 이제는 억수같이 비가 오더라도 점차 양심이 우둔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들판에 계신 하나님, 해운대에도 계신 하나님, 역시 설악산의 주일에도 계신 하나님을 아무 두려운 마음 없이 다시 만나기 시작한다.

한 때 은혜를 받고, 자신의 죄가 아파 울고, 울다가 또 지은 죄가 생각나 그것 때문에 울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죄의 확신때문에 웃던 지난날의 은혜 받았던 기억들! 영적으로 민감할 때는 조그마한 죄만 발견되어도 그렇게 마음 아프고 회개가 되더니, 어느새 무디어져서 감각조차 없이 살아온 나날들이 우리들의 초상이 아닌가?

 

2. 무지개가 떴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인 무지개는 언제나 떴다. 처음에는 감격했지만 비 온 후 언제나 반복되는 무지개의 출현으로 인하여 감동과 평안의 마음이 서서히 반감되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지난 번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아도 별 일 없었다구! 그 날도 은혜의 무지개는 떴지, 아마!”

 

(1) 우리가 가장 경개해야 할 신앙의 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적 매너리즘이다.

이러한 영적 무감각은 언제나 우리를 신앙적으로 퇴보하게 만든다. 믿음 생활이 식상하게 만 느껴진다. 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언제나 회개하면 내 죄는 용서되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구하기만 하면 언제나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시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판에 박힌 타성적 신앙에 안주하게 된다는데 있다.

이것이 우리시대가 만나는 비바람이다. 홍수 전야다. 그러니 은혜의 무지개가 떠도 별 감동이 없다. 또 시간이 지나면 무지개는 뜰 것이니까! 오늘 식으로 이야기하면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하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씀을 자기 편리한 방식대로 믿어 버림으로써 정당하게 살아가야 할 신앙의 삶, 감동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이것이 습관화(화석화)된 신앙의 모습이다.

 

(2) 이것은 광야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에돔을 돌아가야 하는 긴 여정 때문에 마음이 상한 백성들은 또 다시 즉각 불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죽어 갔다. 희망의 출구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계속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광야에서 죽어갈 것이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노아시대의 무지개처럼 모세를 통해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았다: “불뱀을 보면 살리라!”(21.4-9)

이는 마치 노아시대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다. 하나님은 즉시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징계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면 즉각적으로 개입하신다. 이것으로 끝인가? 진정 소망은 없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높이 달린 놋뱀을 본 사람은 즉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렇다. 이처럼 무지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발생했던 홍수의 공포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하는 놋뱀과 같은 것이었다.

 

(3) 변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연일 계속되는 비바람 속에서 무엇이 희망이겠는가? 저 언덕 위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무지개(Rainbow)를 보면서, 쉼 없이 휘몰아친 폭풍우도 그칠 때가 되었다는 안도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비바람은 잠깐이지만 하나님과 그 약속은 영원하다(12).

   

 

부스러기 묵상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갈보리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한! 아직 구원의 때는 끝나지 않았다. 신랑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혼인잔치(25.1-13)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우리는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는 셈이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장대에 달린 놋뱀을 처다 보기만 하면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언약의 무지개와 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찬송가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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