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殺人)의 추억(창 4.1-15)

   20200106(묵상)

  

 

 

살인(殺人)의 추억

Gen. 4.1-15

  

   본문 관찰

 

   제 사(1-7)

     출생(1-2a)

     직업(2b)

     제사(3-7)

   살 인(8):

   심 판(9-15): 결과1

   은 혜(16-26): 결과2

 

      [구조2] 에덴전후사(2.4-4.26)

      에덴에서의 아담(2.4-25): 창조

      에덴을 떠나는 아담(3.1-24): 죄와 심판

      에덴 밖에서의 아담(4.1-26): 후손

   

 

죄의 열매들

 

()의 영향력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죄의 세력은 동산과 아담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과 가인(후손)으로까지 빠른 속도로 전염되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역시 첫 번 타락(3.1-24)과 같은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범죄 질문과 변명 지상에 대한 저주 추방). 가인은 죄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의 영혼은 이미 분노, 선을 행하지 않음, 죄의 소원이라는 죄의 지배권 아래 들어가 있다(5-7). 마침내 창조의 땅에 세 번째 피가 흐르게 된다. 먼저는 타락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에게서, 둘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아벨의 양의 첫 세끼를 드리는 제사에서, 그리고 가인의 살인에서다.

   

 

죄가 살인을 낳고(1-8)

 

   “네가 잘 행하면 들어지지 않겠느냐

    그리고 잘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그리고 그것의 소원은 너에게 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다스릴 것이다.”(7, 사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에덴의 죄는 마침내 세상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죄의 첫 번째 결과는 사망을 낳았다. 사실 가인은 살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길, 즉 경고의 메시지를 받았다(6-7).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아셨고, 그래서 죄에 넘어짐이 아니라 죄를 다스림으로 죄를 이기며 살기를 기대하셨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그분은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심으로 그에게 임재하셨고, 그의 예배(헌신)에 함께 해 주셨다.

그런데 바른 예배에 실패한 가인에게도 찾아오셨다는 점이다(6a):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더욱이 분하여 함, 안색이 변함, 낯을 들지 못함, 선을 행치 아니함, 죄의 소원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을 만나주신다. 맘에 들어서도 아니고, 사랑할 만한 무슨 조건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죄인이기에 죄를 행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임을 아시기에 어떻게든 죄를 다스리며, 그러니까 죄에 넘어지지 않고 죄를 이기면서 그것에 지지 않고 그것을 지배하며 사는 자로 서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잘난 자식 아벨만이 아니라 못난 자식 가인에게 더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고, 그를 도와줌으로써 가인 역시 바른 예배자로 서게 되기를 원하셨을 것 같다. 인간 안에 뿌려진 죄의 쓴뿌리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파멸로 이끌게 되지 않기를 소원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일그러진 당신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어떻게든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되기를 열망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을 보는 일에,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에, 그래서 자기를 이기며 죄를 이기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더욱 아담은 아들이 아들을 죽이는, 가족이 해체되는 뼈아픈 비극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b)는 이름의 가인, 어쩌면 아담은 범죄한 후, 에덴을 떠나 어느 곳에 정착하여 살던 중 자녀를 잉태하고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첫 아들의 이름을 볼 때), 바로 그 한 가닥의 희망이 가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의 비참한 몰락을 바라 본 아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아담은 자신의 마음을 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송두리째 저버렸던 타락의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가인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 같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것 같다.

고독한 아담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식음(食飮)을 전패하고 멍하니 누워 눈물만 흘리며 괴로워하는 아담,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조금은 이해해 볼 수 있는 아담의 하루가 아닐는지 . 조금 살만 했을 것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다시 작은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자라서 양치는 자로, 농사하는 자로 성장하여 부모의 기쁨과 희망으로 점차 자리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을 땅에 묻고, 아니 가슴에 묻고 장사(葬事)를 지내야 했다. 이것이 다 자신이 에덴에서 범죄한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담이기에 그의 슬픔은 다른 그 누구보다 더 크고 컸을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아닌가!

 

 

죄가 심판을 낳고(9-1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금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6.5-7a)

 

하나님이 가인을 멀리 내쫓으셨다. 이 죄의 누룩이 어떻게 자라게 되는가를 창세기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가인 문화역시 하나님의 심판 위에 놓여졌다. 왜 그런가?(6.5-7) 아담의 아들들인 가인의 후예들(4.16-24)과 셋의 후예들(4.25-5.32)이 각각 세상에 흩어졌다. 그러나 셋의 후예 가운데 노아의 가문 외에는 모두가 다 홍수심판의 대상이 되어 반드시 죽으리라!”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아벨의 죽음을 통해 적나라하게 경험한다. 실로 원치 않은 처참한 순간이었다. 사람의 첫 죽음, 그것도 형이 아우를 쳐 죽이는, 싸늘한 돌덩어리로 변해버린 아들의 몸을 끌어 앉고 얼마나 울었을까. 그러면서 아담은 자기의 죄가 이처럼 죽음이라는 심판이 되어 자기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무능력과 무기력 앞에 치를 떨어야 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그러셨듯이 하나님은 이번에도 죄인 가인에게 찾아오신다(9a, 3.9). 하나님은 다 알고 말씀하시는데 가인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다. 죄는 이렇듯 늘 진실을 피해 다니며, 거짓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도록 충동질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던 아담은 사탄() 때문에 죽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며 살던 아벨이 그렇지 못한 삶을 살던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는 언제나 죄()와 악()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그림이다.

가인은 농사꾼이었다(2b). 그런데 아우를 죽인 죄로 말미암아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12a)라는 저주를 받는다. 땅이 곧 생명과도 같은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부가가치(附加價値)를 생산할 수 없다니,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삶이 얼마나 일그러질 것인가를 족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땅이 박토(薄土)여서가 아니라 가인 때문에 그가 밟는 땅이 땅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읽다가 갑자기 북한(北韓)이 생각나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땅이 그 입을 벌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피를 받았은즉 저들이 땅에서 저주를 받아 그 넓고 기름진 옥토(沃土)에서 농산물이 자라지 않는 땅이 바로 북한의 들녘이 아닌가.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할 수 없고, 또 해도 되지 않는 것과 가인의 경우를 동선(同線)에 놓고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반드시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잘 되던 일이 어느 날 전혀 아닌 것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리고 더 이상 회복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로 긴 시간이 흐를 때 한번쯤은 그 이유와 원인이 가인의 경우가 그랬듯이 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 아닐까. 이것이 탕자와 그의 귀향이 시사하는 메시지다.

한 아들은 죽어 무덤으로 내려갔고, 다른 한 아들은 이제 헤어지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 몰락해 가는 가정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 저들의 마음은 어찌했을까. 자녀들을 낳아 기르는 같은 부모로서 깊은 애통이 한 호흡이 되어 느껴진다. 세상은 이렇듯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나 순리마저도 역류시키겠다는 힘의 논리, 강자의 논리, 세상의 논리, 악과 죄의 논리가 판을 치는 그런 곳으로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어찌할까.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

   

 

부스러기 묵상

 

아담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신이 뿌린 죄의 씨앗이 아들에게서 살인이라는 죄의 열매로 거두는 이 기막힌 죄의 집요함을 보면서 온 몸을 떨었으리라. 아내의 말을 듣고 죄를 범할 때는 몰랐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도 누구하나 걸릴 것 없다는 자유함 때문에 마냥 즐겁고 행복했을 것이다. 아내와의 불화 없이 손발이 척척 맞는 화목(?)한 가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순간, 죄가 들어오자 에덴의 모든 영광이 한 순간에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배우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죄는 이처럼 신성한 관계를 여지없이 깨버리고 말았다.

한편 세월이 흘러 아담의 이마에는 노동의 땀방울이 맺히고, 하와의 배는 잉태하는 고통과 수고를 통해 자식을 낳음으로써 에덴 이후의 삶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고 있었다. 가인이 태어나고, 다시 아벨이 태어나 자라면서 누구에게나 그러듯이 많은 세월을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담이 제사(예배) 드리는 것을 보고 배웠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담의 가족들 모두에게 그걸 가르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떻든 가인과 아벨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 앞으로 나아간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3.12)

 

아마도 두 아들이 동시에 제사대회를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사와 그 제사 이후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둘 다 제사를 드리며 자기 일에 충실하며 살았지만 제사 이후가 각각이 드린 제사의 됨됨이를 결정한 것 같고, ()으로 봐도 제사를 드렸음에도 그 이후가 제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과를 낳는 것을, 가인과 아벨이 서로가 알았고, 또 그 결과를 서로가 지켜보았을 것이다.

최초의 제사를 기록해 주는 아담시대의 제사에서 그것을 하나님이 열납하시고,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알며 또 구분(구별)할 수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아담의 가족들 모두는 다 알았다.

문제는 제사도 제사지만 제사 이후를 풀어가는 삶(시각)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제사를 드리고도 그럴 수 있다는 점, 이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양상이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 원인이 제사를 드린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을까. 그리고 마치 이처럼 된 것이 아벨 때문인 것처럼 그를 들에서 죽이고 말았을까.

아담과 하와는 창조에서 실낙원까지의 이야기를 가인과 아벨에게 다 해 주었을 것이다. 이쯤 저들은 죄가 무엇이며, 왜 자신들의 가정이 이처럼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았고, 또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비록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고, 이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친밀함을 유지하는 길을 따라, 그것의 한 방편으로써 제사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 당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듯이(3.21), 아벨은 하나님이 그러셨듯이 동물을 잡아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그것으로 대신 속죄(贖罪)했으리라. 하나님이 양()을 잡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4). 대신 죽은 어린 양을 보면서 언젠가 여자의 후손’(3.15)이 속죄를 이룰 그날을 희미하게나마 믿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벨은 가고 자신과 닮은꼴인 가인만 남았으니까. 더 기막힌 것은 이제 가인마저 떠나고 하늘 아래 무슨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오죽이나 허무하고 답답했을까. 그 세월이 무려 130년이었으니 참으로 암담한 영적 어두움이다(5.3). 아비지만 아들에게 영적 영향력이나 권위를 주거나 인정받을 수 없는, 이것이 아담이 지불해야 했던 죄의 대가였다.

아담 가정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나의 자리를 생각해 본다. 나 한 사람이 그릇될 때 그것이 몰고 오는 파장은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두에게 심각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고, 의로운 아벨의 죽음을 가인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않으셨듯이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하신 길이다(9.27). 아벨처럼 살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고도 죽을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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