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天地創造(창 1.1-23)

   20200101-02(묵상)

  

 

 

천지창조(天地創造)

Gen. 1.1-23

  

   본문 관찰

 

   창조주 하나님(1-2)

   창조 기사(3-23)

     첫째 날(3-5) - , 어둠

     둘째 날(6-8) - 하늘

     셋째 날(9-13) - , 바다

     넷째 날(14-19) - ,

     다섯째 날(20-23) - , 물고기

 

        [구조2]

        창조 선언(1.1): 시작

        창조 기사(1.2-31): 과정

          창조 이전(1.2)

          6일 창조(1.3-31)

        창조 축복(2.1-3): 완성

   

 

보시기에 좋았더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분의 창조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의 시작은 태초로 올라간다. 하나님은 창조주(조물주)의 경륜과 섭리를 따라 창조의 계획을 작정하시고, ‘태초에이를 말씀으로 이루셨다. 이것이 창조의 아침이 밝아오는 시작이다. 한편 창조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의 전적인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에 인간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동역(보조)했거나 참여한 것이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이렇듯 정확하게 구분(구별)된다. 창세기 1-2장이 전하는 창조이야기는 이를 확증하여 보여준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 그분은 심히 행복해 하신다.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꿈이 드러나는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게 느껴진다. 특별히 혼돈하고 공허’(2a)할 때에도 하나님의 신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그러셨듯이 나도 흑암이 깊음 위에있는 상황과 형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위대함을 맛보며 살고 싶다. 나의 무능함과 못남과 연약함까지도 그대로 품고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아침이다.

창조의 대서사시(大敍事詩)를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이처럼 함께 성취해 가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2). 태초부터 하나님은 이처럼 삼위로 계셨다(26, 3.15).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하고도 위대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위대한 능력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삶의 전 영역에서도 그 어떤 것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권위와 힘을 인정하며 살아야겠다. 돈이나 건강이나 지위고하(地位高下)와 같은 것들이 갖는 현실적인 힘은 늘 알고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영적이며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유한한 것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진정으로 나의 삶이나 의식구조에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는 영적 존재로서의 나됨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권위를 가장 우선에 두고 언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피조물인 나의 나됨을 향한 가장 바람직하고 선한 결정 아닐까. 특히나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본래의 의도하심일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것이 창조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경외감마저 든다. 말씀이 힘이요 능력임을 입으로 시인하는 만큼 그것이 나의 삶에서도 능력이 되어 열매를 맺도록 말씀 앞에 서며, 동시에 말씀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말씀 앞에 엄숙히 서 본다.

   

 

피조된 세상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있으라! 나뉘라! 드러나라! 이루게 하라! 하라! 내라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이것이 창조가 이루어진 방식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창조되었다. 놀라운 것은 하늘과 땅도 주의 말씀에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현현(실재)케 하는 일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우주만물(宇宙萬物)이 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물며 아들인 내가 주의 말씀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상마저도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피조 되었다면 내가 따라야 할, 순종해야 할, 이루어야 할, 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이것이야말로 모든 피조물들이 다 고대하는 바가 아닌가.

처음 세상이 창조될 때를 상상해 본다(아마도 이 다음에 천국에서 그때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을까). 아무 것도 없는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오직 말씀 하나로 혼돈이 끝이 나고 빛과 어두움이, 하늘이, 땅과 바다가, 해와 달과 별이, 각종 새와 물고기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 형체를 드러내며 창조하신 분의 영광을 찬란하게 반사하는 그 장엄한 광경을! 한편 이곳 지구에서 태양까지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면 약 20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곳, 즉 목성이나 해왕성이나 명왕성까지는 또 얼마나 머나먼 거리일까.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말씀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다스림과 주권 안에 두셨다니 생각할수록 엄청난 창조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흑암이 물러가고 빛이 왔으며, 비로소 낮과 밤이 시작되었다(2-5, 첫째 날). 다시 우주의 지붕인 하늘이 생기고(7-8, 둘째 날), 그리고 다시 바다와 땅(육지)이 자기 자리를 잡았다(9-13, 셋째 날). 놀라운 것은 이 셋째 날인데, 하나님은 만드신 땅에 곧바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11-12) 명하시자 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서 넷째 날엔 첫째 날 만드신 하늘을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시고(14-19),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만드신 하늘(윗궁창)에 새들로 채우시고(20,21b,22b), 동시에 셋째 날에 만드신 바다에 각종 물고기들을 만드셔서 바다 물에 충만케 하셨다(20,21a,22a). 그리고 셋째 날을 완성하시는 여섯째 날의 창조 작업을 이루심으로써 비로소 창조의 서정이 목적을 성취하신다(24-31). 참으로 질서정연하고 조화로운 창조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각기 그 종류대로 .”

 

지금 내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하찮은 미물도 다 만든 사람이 있다면 이 우주만물(宇宙萬物)이야 물으나 마나 한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영역이다. 만든 것까지를 진화와 우연이라는 가설에서 시작하겠다면 이야 말릴 순 없지만 이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가설을 사실처럼 왜곡하여 창조를 거스르는 헛소리를 토해내니 이거야 경우 없고 무지해도 유분수다. 이것이 허구에 불과한 가설에 기초한 진화론쟁이들의 허황된 망상이다.

세상은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이었다. 하루하루마다 창조된 것들이 그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니까 해 같고 달 같고 나무 같고 새 같고 물고기 같다가 점차 해가 되고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해는 해요, 달은 달이요, 새는 새요, 물고기는 물고기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메바와 원숭이 사이에, 그리고 다시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어떤 진화의 연결고리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며 그 어떤 실수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조된 인간이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되지 않은 헛된 사변을 늘어놓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역하고, 창조주의 영광을 피조물들이 거부하면서 하나님까지를 인간의 유한하고 천박한 지식으로 편집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피조물의 조물주를 향한 도전인 셈이다.

창조된 세상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5,8,13,19,23,31)라는 창조의 법칙을 따라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오류 없이 정확하게 유지되어 왔다. 만드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우연하게 서로 조합되어 동거생활을 시작했다면 이런 조화와 균형을 따라 유지되어 오지 못하였을 것이고, 필연적으로 어느 것 하나와 다른 것 하나가 서로 충돌하여 질서를 잃고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화론자들마저도 이것을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첫 우주와 지금의 우주 사이에 잃어버린, 말하자면 중간우주라는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없다. 처음부터 우주는 만드는 분의 의도와 목적과 섭리를 따라 정확하게 그것에 순종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실수란 있을 수 없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자 의무다. 지금껏 피조물이라는 단어에 내 이름을 넣어도 이 원리는 동일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나를 조성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하여 창조주를 거스르고 도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것으로 끝이다.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고 확신하고 있는 이상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 영광된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며 살 것이다. 이것의 나의 희망이자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나를 보면서 내 마음을 스쳐간 묵상들을 잠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 날짜
노아, 열국(列國)의 통로(창 9.18-10.32) 2020.07.21
무지개를 보라!(창 9.8-19) 2020.07.21
노아, 복(福)받기(창 9.1-7) 2020.07.21
노아, 또 하나의 시작(창 8.1-22) 2020.07.21
홍수심판, 방주구원(창 7.1-24) 2020.07.21
노아, 방주짓기(창 6.9-22) 2020.07.20
노아, 은혜입기(창 6.1-8) 2020.07.20
아담, 800年의 희망찾기(창 5.1-32) 2020.07.20
아담, 130年의 고독끊기(창 4.16-26) 2020.07.20
살인(殺人)의 추억(창 4.1-15) 2020.07.20
화염검(창 3.20-24) 2020.07.19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야(창 3.9-19) 2020.07.19
전적타락.全的墮落(창 3.1-7) 2020.07.19
에덴동산(창 2.4-25) 2020.07.19
인간창조.人間創造(창 1.24-2.3) 2020.07.18
천지창조.天地創造(창 1.1-23) 2020.07.18
창세기 맥잡기 2020.07.01